<천장지구>의 마지막 장면. 머리에 심한 충격을 입고 코피를 줄줄 흘리는 유덕화가 우체통으로 웨딩숍 유리를 박살내고는, 오천련과 함께 각각 턱시도와 드레스를 맞춰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성 마거릿 성당으로 향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들만의 결혼식. 하지만 달콤한 순간도 잠시, 유덕화는 오천련을 이곳에 남겨두고는 복수를 위해 역시 오토바이를 타고 센트럴의 가스등 계단으로 떠난다. 지갑도 챙기지 못하고 허둥지둥 유덕화를 따라나왔을 그녀를 심야에 택시도 잘 다니지 않는 곳에 남겨두고 떠났다는(-_-;) 생각이 잠시 스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애절하게 원봉영의 <천약유정>이 흘러나오는 그 장면은 <나의 소녀시대>에도 오토바이를 탄 왕대륙의 모습으로 패러디될 만큼 홍콩영화의 추억의 명장면이다.
“철없는 시절 꿈을 좇길 사랑했고, 단지 앞을 향해 날아가고 싶어 했지”라고 노래했던, 역시 유덕화의 노래 <망정수>(忘情水)는 또 어떤가.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이 적룡의 복수를 위해 떠났던 대만, <용의 가족>에서 유덕화의 형제 알란탐이 잠시 숨어 살던 대만, <용등사해>에서 유덕화의 매형이 될 뻔한 등광영이 세력다툼에 밀려 떠날 수밖에 없었던 대만, 바로 그 대만에서 유덕화의 인기는 이제 하늘을 찌르게 된다. 바로 그 <망정수>는 유덕화 주연 영화 <천여지>의 만다린 주제곡이었다. 그런데 유덕화는 언제나 영화에서 죽었다. <천여지>에서도 죽고, <투분노해>에서도 죽고, <천장지구>에서도 죽고, <복수의 만가>에서도 죽고, <지존무상>에서도 죽고, <오호장>에서도 죽고, <용재강호>에서도 죽고, <풀타임 킬러>에서도 죽고, <결전>에서도 죽고, <파이터 블루>에서도 죽고, <삼국지: 용의 부활>에서도 죽고, <무간도> 마지막 편에서도 죽는다. 설령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강호정>에서는 죽을 ‘뻔’하고, <암전>에서는 죽은 ‘척’하며, <열혈남아>와 <연인>에서는 죽은 ‘듯’ 보인다.
그런 점에서 <나의 소녀시대>는 또 다른 이유로 눈물나도록 가슴 뭉클한 영화였다. 내게 유덕화는 영화의 마지막이면 언제나 죽어 없어지는 존재였는데, <나의 소녀시대>에서는 마지막에 가서야 등장했기 때문이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지난 시간 그 수많은 영화 속 죽음을 딛고 성장하여 기어이 살아남은 화어권 최고의 배우가 거기 있었다. 그런데, 유덕화에 대한 그런 추억이 없는 지금의 젊은 관객도 <나의 소녀시대>를 좋아한다니 감회가 새롭다. 아니, 무엇보다 팬들이나 언론 그 누구도 왕다뤼나 왕따루로 부르지 않고 당당히 왕대륙으로 불러서(혹은 친근하게 왕서방) 기분이 좋다. 홍콩영화 침체기의 지난 10여년 동안 내가 무슨 홍길동도 아닐진대, 주윤발을 주윤발이라 부르지 못하고 장국영을 장국영이라 부르지 못한 채, 각각 저우룬파와 장궈룽으로 부를 수밖에 없었던 시간이 야속했던 것이다. 뭐 외국어표기법에 대한 공식적인 이의 제기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모처럼 이런 분위기가 좋았다는 얘기다.
끝으로 개인적인 얘기를 덧붙이자면, 위의 내용은 내가 쓴 스테디셀러인(;;;;) 홍콩영화여행 가이드북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에서 유덕화에 관한 부분을 적당히 재가공한 것이다. 2010년에 썼던 그 책이 얼마 전 절판되면서, 오랜 홍콩영화의 침체와 홍콩 스타의 노쇠화와 겹쳐 얼마간 우울한 마음이 들기도 했는데,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면 좋을 것 같다, 는 사심 어린 바람을 가져본다. 굳이 판매량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동안 장소나 기타 등등 변동사항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기쁜 마음으로 개정판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쇼브러더스 세대 이화정 기자와 종한량 세대 윤혜지 기자가 세대차를 뛰어넘어 함께 준비한 이번호 대만 청춘영화 기획을 즐겨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