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영화는 우리에게 아직 미지의 영토다. 하지만 미처 알려지지 않았을 뿐 지금도 그곳에선 수많은 영화가 사람들의 삶을 실어 나르고 있다. 제5회 아랍영화제를 맞아 한국을 찾은 메르작 알루아슈 감독은 1976년 첫 장편 <오마르 가틀라토> 이래 40년간 22편의 작품을 선보이며 알제리의 현실을 전해왔다. 그는 혁명과 영웅 이야기가 주류였던 알제리영화계에 처음으로 평범한 개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아랍영화계의 산증인이다. 한때는 풍자 섞인 웃음으로, 지금은 엄혹한 시대에 맞선 날카로운 시선으로 알제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거장의 영화 세계는 오늘도 쉼 없이 전진 중이다.
-이번에 무려 3편의 영화를 한번에 소개하게 된 소감이 어떤가.
=내가 영화를 만드는 중요한 동기는 관객의 반응을 듣기 위함이다. 유럽과 아시아는 몇번 왔지만 한국은 처음이라 관객이 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토론의 시간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홍상수 영화를 좋아해 한편도 놓치지 않고 다 봤다. 그가 한국 사회에 대해 그려내는 비전, 예컨대 인간관계, 애정관계, 젊은 사람들의 생각과 말이 특히 흥미롭다. 이번에 직접 온 만큼 홍상수 영화와 실제 한국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닮았는지 주의 깊게 관찰 중이다. (웃음)
-아랍문화권 영화는 한국에서는 아직 생소하다. 알제리의 영화시장은 어떤가.
=전반적으론 쇠퇴하고 있다. 이전의 아랍영화를 주도한 건 이집트영화들이다. 할리우드 스타일의 뮤지컬영화를 비롯해 탄탄한 장르적 전통을 자랑한다. 지금은 영화보다는 TV드라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아랍문화권은 언어를 단일하게 사용하지만 영화가 제대로 공유되거나 유통되지 않는다. 사회적 의식을 영화로 꺼내는 일도 드물다. 있다 해도 접할 기회가 많지 않다. 작가영화들에 대한 영화 비평은 실리지만 이를 배급하려는 이는 드물다. 이번의 나의 한국 방문 역시 모든 알제리 언론이 보도를 했지만 알제리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것조차 어려울 만큼 부조리한 상황이다.
-작가주의영화들을 소개하기 어려운 상황이란 말인가.
=영화를 비롯한 영상물 자체가 표현으로서의 힘을 상실하고 있다. TV 매체는 활발하지만 기본적으로 심각한 이야기를 하기 꺼려한다. 예술영화는 유통상의 규제라기보다는 자기검열이 심한 편이다. 지원금 제도가 있지만 아무도 보지 않는 역사물 등이 지원을 받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그런 욕구가 없는 건 아니다. 실제로 <마담 쿠라주>를 개봉했을 때 관객과의 대화 자리마다 영화가 지적한 사회문제에 대한 대화와 토론을 원하는 알제리 청년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작업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당신의 영화는 90년대를 기점으로 크게 변화했다. 초기 작품들은 유머를 통해 사회의 메커니즘을 전했다면, 이번에 소개된 3편의 영화들은 훨씬 건조하면서도 사실적이다.
=초기 작품들도 정확히 말하면 코미디라고는 할 수 없다. 데뷔작 <오마르 가틀라토>나 내 흥행작 중 하나인 <슈슈>(2003)에서 웃음을 경유했던 건 아이러니를 부각하기 위함이었다. 사회적인 메시지는 언제나 나의 화두였다. 알제리는 프랑스로부터 해방된 이후 격변의 시기를 겪었다. 민주화는 요원했고, 종교가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는 암흑의 10년이라 부를 만하다. 92년 영화를 찍고 있을 때 큰 테러가 일어났고 신변의 위협을 느껴 지금은 프랑스에 머물고 있다. 매일 끔찍한 뉴스로 도배가 되는 걸 보며 웃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의욕을 잃었다.
-<지붕 위의 사람들>은 알코올중독자, 현재 고문하는 사람, 가족을 가둔 설교자 등 각각의 인물들을 통해 알제리 사회 안에 녹아든 폭력에 대해 다층적인 면을 선보인다. 어떤 면에서는 다큐멘터리에 가깝기도 하다.
=90년대 이후 내 영화의 색이 바뀐 또 하나의 이유는 기술적 변화에 따른 것이다. 촬영장비가 경량화되어 이야기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지붕 위의 사람들>의 경우 적은 수의 스탭으로 조용히 작업했고 11일 만에 촬영을 마쳤다. 나는 영화를 통해 이 상황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관찰자 중 한명이다. 리얼리즘적 요소를 강화하는 등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접근한 것은 현실의 창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다.
-<마담 쿠라주>에 나오는 ‘마담 쿠라주’라는 마약은 실제로 테러리스트들이 이용하는 약물 중 하나라고 들었다.
=쿠라주는 ‘용기’(courage)란 뜻이다. 먹으면 무한한 용기가 생겨난다며 테러리스트들이 젊은이들에게 먹이는 항정신성 약물이다. <마담 쿠라주>의 등장인물은 허구지만 소재나 방식은 다큐라고 해도 좋다. 이 영화를 통해 천국에 가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왜 자살테러를 강요하는지, 당신들에게 천국이란 무엇인지, 종교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제리 관객에게 되묻고 싶었다.
-지금 알제리에서 영화를 만든다는 건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영화는 창조다. 하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창작 과정에서 내가 바라보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나만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 알제리 사회를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선은 시민들로부터 내가 전달받은 것이고, 이것이 다시 영화 관람을 통해 시민들의 공감과 반응으로 확산될 수 있다. 설사 지금 당장 정상적인 경로로 관람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일지라도 기록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본다. 억압과 폭력 등 어려운 시기를 관통하고 있는 조국에 대한 기록이 언젠가는 지금을 기억하기 위한 아카이브가 될 것이라 믿는다.
메르작 알루아슈 감독에게 직접 듣는 초청작 코멘터리
<용서받지 못한 자>
2012년 / 87분 / 2012 칸국제영화제 유로파시네마레이블상
알제리 정부는 90년대 암흑의 10년을 마무리하는 방법으로 ‘국민화해법’을 강요했다. 지금껏 행한 테러행위에 대해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고 묻어버리겠다는 이 조치는 오랜 시간 자행된 극단적 폭력을 정치적 기억상실로 만들어버리는 행위였다. 핸드헬드를 통해 현실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려는 인물을 표현했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내 영화에선 감정을 지시하는 음악을 사용하지 않는다.
<지붕 위의 사람들>
2013년 / 91분 / 2013 아부다비국제영화제 감독상
하루 다섯번의 기도 시간으로 나뉜 알제리의 하루를 그렸다. 알제리를 대표하는 5곳을 배경으로 서로 다른 사연들을 보여준다. 다섯 이야기는 아무 연관이 없다. 유일한 공통점은 옥상이라는 공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옥상은 알제리 시내에 울려퍼지는 기도 소리를 통해 같은 공간으로 연결된다. 사운드 디자인에 특히 공을 들였고 침묵, 어쩌면 강요당한 침묵을 중요한 코드로 활용했다.
<마담 쿠라주>
2015년 / 90분 / 2015 베니스국제영화제 오리종티부문 초청
알제리 시내 빈민촌의 묘사와 사실적인 분위기를 전달했다. 스튜디오 촬영 없이 실제로 존재하는 마을에서 찍었고 소품 하나도 인위적으로 세팅한 게 없다. 어떤 이들은 영화 속 비위생적인 주거지의 모습이 알제리의 이미지를 떨어뜨린다고 비판하지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게 내 역할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