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뉴스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김종필씨를 만나고 안동 하회마을을 가는 등 대선행보를 시작했다는 기사가 즐비하다. 그 와중에 박근혜 대통령은 아프리카 우간다를 방문하고 있다. 왜 하필 독재자가 수십년째 집권 중인 우간다인가? 박정희 전 대통령 때 수교를 맺었고, 우간다가 새마을운동을 벤치마킹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면 이해 정도가 아니라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든다. 4대악 근절에 1970년대에나 어울릴 ‘불량식품 근절’이 포함된 것을 본 이후로는 여간해서 놀라지 않는다. 모두 ‘애도의 정치’일 뿐이다.
다른 능력이 아무리 탁월해도 주어와 술어의 일치에 자주 어려움을 겪는 정치인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 국가의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그것은 알다시피 아버지의 유산 덕분이며, 정확히 말하면 ‘갑자기 불명예스럽게 살해된 지도자를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사람들의 애틋한 감정’ 때문이다. 그 인간적인 감정은 수백만명의 표로 응고되어 정치적 자원이 되었다.
그리스신화의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이다. 새로운 테베의 통치자로 등극한 크레온은 왕위 계승을 위해 싸우다 죽은 폴로니케스의 시신을 장례 치르거나 애도하는 것을 금지한다. 오이디푸스의 딸이자 폴로니케스의 동생인 안티고네는 이에 맞선다. 안티고네는 신의 법에 따라 혈족의 장례를 치르는 것을 인간의 법이 금지할 수 없다고 항변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안티고네다. 그의 정치는 그의 혈족을 제대로 장례 치르고 애도해 달라는 안티고네의 항변이다. 안티고네는 결국 죽음에 이르렀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애도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억압된 심정이 표로 귀환함으로써 승리하였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넘어선 원초적 힘이었다.
경쟁자는 어떠했는가. 안철수 후보의 사퇴로 야권의 단일후보가 된 문재인 후보는 또 다른 안티고네가 아니었던가. 불명예스럽게 몸을 던진 노무현 전 대통령을 애도하는 마음에 대한 이해 없이, 지난 대선에 패배하고도 여전히 건재한 그의 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지난 대선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애도의 정치’의 격돌이었다.
이제 한 안티고네는 아버지의 시신을 제대로 매장함으로써 뜻을 이루었다. 또 다른 안티고네는 내년 대선에서 다시 애도의 대변자가 될 것이다. 그가 당선되어 원하는 애도가 이루어지면, 21세기 초반 한국 정치를 휩쓸었던 ‘애도의 정치’는 일단락된다. 만일 또 당선되지 않는다면, 힘을 다한 태풍처럼 ‘애도의 정치’가 소멸할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후보가 바통을 이어받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내년 대선은 천하 삼분에 성공한 모험 기업가와 또 다른 안티고네 그리고 지구방위사령관(?)의 후광을 가진 외교관의 대결이 될 것인가. 일반의 직관과 달리 유엔 사무총장직의 수행보다 국내 정치가 훨씬 어렵기에 외교관의 출정은 아직 알 수 없다. 모험 기업가와 안티고네의 출정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거의 분명해 보인다. 출정한 누군가는 뜻을 이루겠지만, 누가 뜻을 이룰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만 누가 대선에 출마하고 누가 승리를 하든, 이제 한국 정치에서 ‘애도의 정치’는 이것으로 마무리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