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비상>의 배경은 자연이다. 에펠탑이나 자유의 여신상은 이 영화 속에 섬처럼 자리잡은 문명의 돋을새김이다. 등대나 트럭 같은 최소한의 문명 역시, 스크린 속의 위대하되 더러 지루한 자연에 풍미(風味)를 내려고 덧놓은 고명처럼 보였다. 요컨대 이 영화의 시선이 큰 틀에서 멎는 곳은 문명 이전의 상태다. 쌓인 눈을 털어내는 산악, 끝간 데가 보이지 않는 바다와 사막, 거대한 얼음덩어리, 한낮의 해와 한밤의 별무리 같은 진짜 자연 말이다. 젊어서 죽은 시인 기형도는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믿는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잠언의 위대함으로 휘감긴 자연을 바라보는 객석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왜소하다.
<위대한 비상>에 등장하는 배우는 새들이다. 이따금 몸뚱이를 드러내는 사람이나 말이나 원숭이나 물고기나 게나 악어나 물개(가 아니라면 바다표범이겠지) 따위의 이종(異種)은 주책없이 끼어든 ‘깍두기’일 뿐이다. 그 새들은 ‘이주민’ 또는 ‘떠도는 무리’(Le Peuple Migrateur: 이 영화의 원제다)라는 이름을 지녔다. 다시 말해 그 새들은 철새다. ‘철새’라는 말은 한국 정치의 비틀림 속에서 매우 부정적인 뜻빛깔을 띠게 됐지만, 나는 이 더럽혀진 말에서 어떤 낭만적 진취성을 떠올린다. 나그네의 운명, 떠돌이의 운명을 유전자에 내장한 철새들에게, 산다는 것은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텃새의 텃세를 무릅쓰고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하며 태양계의 제3행성 전역을 자신들의 거처로 삼는다. 그것은 멋쟁이 미래학자들이 21세기적 삶의 유형으로 정식화하고 싶어했던 유목민의 모습이다. 내 몽상 속에서, 그 새들은 질서와 안전보다 자유를 선호하는 무리다. 그 새는 감옥 속의 김지하가 썩은 피를 흘리며 부러워한 “청한 하늘 푸르른 저 산맥 넘어 멀리 떠나가는 새”다.
<위대한 비상>은 우리(라는 말로 내가 뜻하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다)가 사는 행성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나는 이 행성의 주인이 우리가 아닐지 모른다는 예감 속에서 편안하다. 그 편안함은 내 고질적인 염세혐인(厭世嫌人) 신드롬의 한 증세일 것이다. 철새들만을 보여주는 필름에서 이런 편안함을 느꼈다면, 총체적인 자연 다큐멘터리는 나를 황홀경으로 몰아가리라. 나는 이제부터라도 거기 탐닉해야 하리라. 고등한 지능을 지닌 외계 생물이 우리 행성에 찾아든다면, 그들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깃들일까?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느 소설가는 언젠가 이 잡지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난에서 고등한 생물은 당연히 평화애호적일 것이므로 그 문제를 걱정할 이유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나는 그 말이 그리 미덥지가 않다. 진짜 고등한 생물이 보기에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지구의 다른 동물들 사이에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인간은 하찮은 하등동물, 그것도 극도로 폭력적이고 탐욕스러운 하등동물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비상>의 화면들은 새들로 채워져 있었다. 새가 날아들었다. 온갖 잡새가 날아들었다. 산고곡심(山高谷深) 무인처(無人處) 춘림비조(春林飛鳥) 뭇새들이 농춘화답(弄春和答)에 짝을 지어 쌍거래(雙去來) 날아들었다. 정말 별 새 다 보네 하는 말이 터져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 새들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에서처럼 겁을 주지는 않았다. 날 수 없어 뒤뚱뒤뚱 뛰는 임금펭귄들은 그 직립보행의 ‘인간미’가 차라리 안쓰러웠다. <위대한 비상>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다운 영화다. 이 영화 속의 현실은 환상 같은 현실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글 자막이 그 장려한 그림들을 갉아먹고 있었다. 물론 내레이션과 원어 자막이 많지 않아 한글 자막이 자주 뜨지는 않았지만. 이 영화는 떠도는 무리를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들려주기도 하였다. 그들의 울음소리와 날갯짓소리를 말이다. 문득, 수렵꾼들이 총을 쏘아 새를 잡는 장면이 마음에 걸렸다. 설마 그 불놓이 장면이 연출된 것은 아니겠지? 새들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새들을 죽이지는 않았겠지? 박남수의 관찰에 따르면,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관을 나오며 아내는 내 손을 잡았다. 그날 따라 유난히 그녀 손이 꺼칠했다. 나와 함께 산 세월의 가난한 노동을 입증하는 나이테였다. 내 다리는 기원이 흐릿한 죄의식으로 후들거렸다. 아니다. 다리가 후들거린 것은 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내와 나는 남대문쪽으로 걷다가 시장 안의 허름한 간이 식당으로 들어갔다. 하루의 고된 노동을 소주로 달래는 떠돌이들이 우리 눈 안에 들어왔다. 갈색 피부의 떠도는 무리가. 이주 노동자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