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분노하거나 궁지에 몰리면 괴력을 발휘한다고들 한다. 나는 3X년 살면서 그런 경우를 딱 한번 보았고, 딱 한번 들었다.
199X년 XX대학 인문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입시 끝나고 3년 만에 처음으로 온갖 ‘경우의 수’를 조합하며 계산 결과를 도출하던(3년 내내 과외 대신 서빙만 했다, 강남 어머님 상대하느니 주정뱅이를♡) 나는 고민에 빠졌다. 참가비를 올리면 욕을 먹고 참가비를 내리면 적자를 면치 못할진대 전대 학생회로부터 물려받은 빚이 300하고도 몇 십만원, 그렇다면 비용을 줄이는 수밖에. 스물두살 어린 나이에 거대한 가난 보따리를 짊어지고 산에 올라 숙소 사장을 만난 나는 사들고 온 치킨과 함께 마지막 카드를 제시했다, 방 네개만 빼주세요, 60명은 행사 끝나고 나서 강당에서 잘게요. 딜 성사, 플러스 마이너스 0원, 나 경영대 갈걸 그랬나봐, 아, 성적이 안 됐지. 하지만 인생의 본질은 배신이다.
잔금을 치르던 아침, 사장은 말했다, 27만원 더 내. 뭐라고요? 그럼 빚이 300에 몇 십만원하고도 27만원이 되는데? 진상은 이랬다. 반짝이와 플래카드가 널브러진 추운 강당에서 뒤엉켜 자던 모 과 학생회장이 뭐에 분노했는지는 모르겠지만(이봐, 방금 말했잖아, 반짝이하고 플래카드가 널브러진 추운 강당에서 재웠다고) 화장실 세면기를 떼어 패대기를 쳤다는 것이었다. 나는 웃었다. “그게 말이 돼요? 아무리 취했어도 사람이 장비도 없이 맨손으로 어떻게….” 그 순간, 학생회장의 동기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말이 돼. 그리고 그는 모 과의 전설로 남은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헐크가 1학년 때 일이었지. 학교 들어오자마자 짝사랑에 빠진 여자애가 있었는데, 하필이면 걔가 제일 싫어하던 애랑 사귀기 시작한 거야. 엠티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됐어. 걔네가 애들 보는 앞에서 뽀뽀를 했거든. 그래서 헐크가 어떻게 됐느냐 하면… 민박집 문짝을 떼서 그걸로 남자애를 때렸어.” … 나는 방에서 자기를 잘했지, 세면기로 맞을 뻔했다. 그렇게 사랑이 떠난 자리엔 초능력만이 남았다.
사랑에 빠지면 일단 별을 따야 하므로 초능력이 생길 것도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애인 있는 인간들은 헝그리 정신이 없어서 안 돼, 나태해진다고. 배고픈 자만이 힘을 갈구하는 법이지. 감독이 가슴 크고 예쁜 여자들을 타입별로 정리해서 모아놓은(그리고 벗겨놓은) 회심의 프로젝트가 아닐까 싶은 영화 <모두가 초능력자>를 봐도 그렇다.
이 영화에서 별빛의 정기를 받아 초능력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애인 없음, 한 적 없음, 가망도 없음. 우주의 초능력이란 공평하기도 하지, 그래도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돕던, 그러니까 자위하던 자들에게 은총을 내리시니. 그리하여 초능력에 젖은 일본 시골 마을엔 벗은 여자들의 신음만이 낭자하였으니 감독님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
하지만 분노가 초능력을 부른다는 사실만은 진짜다. 21세기 대한민국만큼이나 출신 서열이 분명하여 히어로의 자식만이 히어로가 될 수 있는 초능력자 학교에 다니는 <스카이 하이>(스카이라니, 제목이 의미심장하다)의 윌(마이클 안가라노)은 유서 깊은 히어로 가문 스트롱홀드의 자손인데도 초능력을 쓰지 못하다가 제대로 열 받은 다음에야 괴력을 발휘한다. 그래, 세일러문도 애인이랑 친구들이 다 죽어가야 힘을 쓰더라고. 러닝타임 채우느라 그러는 줄 알았는데, 역시 헝그리 정신이 필요한 거였어.
그리고 정말 심하게 화가 나면 그렇지 않아도 초능력자였던 사람이 새삼 초능력자가 된다. <초능력자>의 강동원 (이름 없음, 물어봐도 안 알려줌)은 눈에 보이는 사람은 모두 조종할 수 있다더니 고수(이름 있음, 규남이) 때문에 화난 다음엔 5층은 돼 보이는 건물 모퉁이에 있는 사람들까지 몽땅 움직인다. 눈이 커서 그런가, 시야의 사각지대가 없어. 근데 강동원이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서 금고 열라고 하면 구태여 초능력 쓰지 않더라도 막 열어줄 거 같은데, 현금 말고 뭐 더 필요하신 건 없는지도 챙기고. 그나저나 이 영화에서 정말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건 규남이다. 돈만 훔쳤다 뿐이지 나름 착하게 살던 초능력자를 괴롭혀서 살인자로 만들지를 않나, 소년 탐정 김전일 수준으로 주변에 대학살을 일으키지를 않나.
그러므로 초능력자를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 사람들은 원혼으로만 알고 있지만 <링>의 사다코와 그 엄마도 살아 있을 때는 초능력자였다. 초능력자 프로그램에 나갔다가 망신을 당해서 그렇지. (망신 대신 격려를 얻으면 <조용한 세상>의 김상경처럼 평범한 초능력자가 될 수 있다.) 그냥 사람이 죽어 원혼이 되어도 <주온>이 나오는데 살아서 이미 원혼 수준의 능력을 발휘하던 초능력자가 진짜 원혼이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비디오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든다. 아닌가.
초능력자를 사칭한 희대의 사기꾼 유리 겔러와 앙숙이었던 제임스 랜디는 가짜 초능력자를 잡아내기로 유명했다. 그는 초능력자들이 서는 무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화면을 분석해 속임수를 찾아냈다. 과학으로 승부한 셈이다. 하지만 형상 기억 합금의 성질을 이용해 숟가락을 구부리며 세계를 유람했던 유리 겔러는 과학자들 앞에는 망설임 없이 나섰지만 마술사들과는 절대 만나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랄까, 속이는 자는 속이는 자를 알아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은 밝기도 하다. 속이는 자를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그건 속이는 자가 많지 않다는 뜻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무대 뒤를 폭로하는 카메라가 없는 탓일 수도 있겠고.
진짜 능력은 따로 있다
제아무리 초능력자라도 없는 것보다 있으면 좋을 두세 가지 평범한 능력
눈먼 돈을 알아보는 투시력
일부러 알려주지 않아서 헷갈리는 수가 있겠지만 <초(민망한)능력자들>은 픽션이 아닌 르포가 원작인 영화다. 원작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은 소련에 맞서 초능력 군대를 양성하려 했던 미국방부의 분투를 (이렇게 말하니까 여전히 픽션처럼 들리겠지만, 르포가 맞다) 추적한 논픽션이기 때문이다. 냉전 시대의 광기를 폭로하는 원작을 이라크 전쟁에 대한 풍자로 바꾼 이 영화에서 내가 발견한 건 이딴 거, 미 국방부엔 눈먼 돈이 많구나, 입찰 들어가고 싶다. 반짝이는 눈동자로 토착 민요를 부르며 평화의 언어를 말하면 적군이 항복한다는 헛소리를 믿다니, 그런 군대라면 내가 가겠다.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는 순발력
무릇 초능력 슈퍼히어로라면 제때 옷을 갈아입을 줄 알아야 한다. 슈퍼맨은 공중전화 부스에서 옷을 갈아입고, 스파이더맨도 어디에선가 해결하고 나오지만, 이런 데서 쓸데없이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건 초능력 없는 그냥 슈퍼히어로들이다. 갑부 배트맨은 전용 탈의실이 있다. 힛 걸(<킥애스> 시리즈)은 영화보다 10초쯤 딴생각하는 사이에 벌써 갈아입었더라. 킥애스는 어디서 갈아입는지 아직 미지수. 초능력 있다고 무조건 히어로는 아니니까 네 일이 안 풀린다고 정부 탓하지 말라는 이데올로기를 에로틱하게 웅변하는 <모두가 초능력자>의 요시로(소메타니 쇼타)마저 의상 하나만은 히어로급의 속도로 갈아입는다. 그냥 여자 교복 입고 있기가 창피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백발백중 영화력
세상엔 총이 많기도 하지만 그중에 비교적 안심해도 좋은 총이 있다면 권총이니, 라고 경찰대 다니던 애가 그랬다. 명중률이 엄청나게 떨어진다고. 그런 권총을 들고, 죽은 자들을 보는 <오드 토머스>의 초능력자 오드 토머스(안톤 옐친)는 테러리스트들을 정확하게 사살하면서 돌아다닌다. 영화 주인공만 되면 명사수 보장. 초능력이 따로 있나, 사실 영화 주인공 하게 생겼다는 것 자체가 이미 초능력에 가까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