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사들은 흔히 먹잇감을 찾아 눈을 번뜩이는 승냥이로 치부되곤 한다. 그들은 어슬렁댄다. 누군가의 주검이나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는 장면은 외면하기 힘든 훌륭한 사냥감이다. 으르렁 찰칵, 크르렁 찰칵. 카메라를 든 승냥이들은 찰칵거림으로 으르렁댄다. 허나 그것이 맛있다!는 감탄사일까.
1993년 아프리카 수단에서 굶주려 엎드린 아이와 아이가 죽기를 기다리는 듯한 검은 독수리를 찍었던 케빈 카터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받았다. 찬사와 동시에 비난이 쏟아졌다. 카터는 자살했다.
2015년 터키 해안에서 엎드려 죽은 채 발견된 3살배기 시리아 난민 쿠르디를 찍었던 닐루페르 데미르에게 쏟아진 것 또한 ‘용기 있는 찰칵’에 대한 찬사와 ‘타인의 죽음을 볼거리로 전락시킨 찰칵’에 대한 비난이었다. 데미르는 어땠을까. 카터를 떠올린 적은 없을까.
‘인간이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 고통이라는 사실은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관심사임을, 고통의 장면이야말로 우리의 시선을 붙들고 만다는 걸 아프게 환기한다. 물론 고통의 관람은, 고통의 연대가 아니다. 그러나 고통의 장면에 눈감은 채 고통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모욕적이다. 누군가 고통받는 장면에 사진기를 들이대는 행위는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고 해도 추악하다. 모욕은 고통받는 사람만 치르는 것일까. 찰칵대는, 그리하여 그 고통을 ‘볼만한 것, 아니 볼 것을 촉구하는 것’으로 만들려는 사진사에게도 그 순간은 모욕적이다. 스스로를 비웃게 된다. 힐난하게 된다.
누군가 ‘찍히는 모욕’을 견디고, 누군가 ‘찍는 모욕’을 견뎠을 때 비로소 누군가의 눈에 사진이 배달된다. 누군가는 원했을 것이다. 모욕 따위 생각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은 모욕이 아닌가. 모욕은 즉각적인 것만이 아니다. 더한 치욕은 시간차를 두고 찾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