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밀가루성애자의 일용할 양식, 라면과 어묵. 보름 동안 먹지 못하고 있다. 내가 과민한 건가. 국내 유일의 소맥제분 기업에서 썩은 밀가루를 납품했고, 대부분의 라면, 어묵, 맥주, 맛살, 햄, 과자 등이 바로 이 소맥전분으로 제조됐다는 내부자 고발이 있었는데도 너무들 조용하다. 후속 보도도 없고, 조사하겠다던 경찰의 결과 발표도 없다. 대형 식품기업들은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었다. 그런데도, 1년에 1인당 평균 74개로 세계에서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 나라의 시민들 반응이 몹시 차분하다. 다들 썩은 쥐와 곰팡이와 방부제 정도는 이제 참고 먹을 만한 것인가.
하기는 썩은 쥐와 밀가루의 콜라보보다 이 둔중한 체념이 더 괴이쩍다. 사회적 부패가 일상화되어서 웬만한 위험은 간에 기별도 가지 않을 정도로 내성이 생긴 걸까. 가습기 살균제처럼 피해자 규모와 치명적인 위험 요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야 그제야 소독약 바르듯 한철 반짝 분노하고 마는 걸까.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삶의 감각이 둔감해진 걸까.
어디, 썩은 밀가루뿐이랴. 1급 발암물질과 중금속 독소들이 흩날리는 미세먼지를 마스크도 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견뎌내는 걸 보면, 우리는 혹시 집단적 무통증을 앓고 있지 않는가 탄식하게 된다. 미세먼지 영향으로 수도권에서만 2만명이 조기 사망하고, 80만명의 폐 질환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사회적 비용만 연간 12조원이 넘는다. 공기질 수준은 전세계 180개국 중 무려 173위. 상황이 이럴진대 왜 우리는 미세먼지의 최대 원인인 제조업 기업들에 사회적 책임을 묻지도 않고 미세먼지 속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GMO는 또 어떤가. 몬산토의 GMO밀이 식탁을 점령한 지 오래다. 중국과 일본은 전부 반품했는데, 한국인만 다 소비했고, 덕분에 세계 최대 GMO 수입국이 됐다. 전세계가 유전자조작 식품에 대한 우려와 분노가 들끓고 있는 와중에도, 한 사람당 38kg의 GMO를 알뜰살뜰 맛있게 먹어치우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가공식품들 중 단 하나도 GMO 표시를 달지 않고 있다.
예컨대 안방에서부터 입구멍까지 모조리 실험실이다. 자본이 이윤을 위해 사람들의 먹거리와 공기조차 착취하는 곳, 전문가들이 기업 돈을 받고 살균제는 안전하고 농약은 과학이라고 버젓이 연구 발표를 하는 곳, 게다가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는 고작 기업의 설거지 역할만 하는 곳, 하지만 시민들은 별다른 저항조차 없이 체념적으로 순응하는 곳, 바로 그게 한국이지 않을까. 썩은 밀가루와 가습기 살인가스와 미세먼지와 유전조작된 식품들로 사육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피실험체가 되는 거대한 공장 말이다.
기업이 먼저 성장하면 젖과 꿀이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올 거라던 신자유주의의 약속을 아직도 철석같이 믿고 있어서 이렇게들 썩은 쥐를 일용하며 순응하고 있는 걸까. 여기는, 오싹할 만큼 미스터리한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