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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원의 도를 아십니까] 시간 여행자의 도(道)

<시간 여행자의 아내>

미래란 언제나 예측 불허, 그리하여 생은 그 의미를 갖는다더니, 불과 몇 시간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마음껏 술을 마시다 눈을 떠보니 열두 시간 뒤의 미래로 도약, 다시 또 잃어버린(그러니까 처음도 아님) 하룻밤 사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신용카드 영수증과 통화 목록을 뒤지면서 추리하고 있자니 이런 문자가 왔다.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 내가 누굴 만날 상황이 아닌 건 알지?” 아니, 몰라. 그건 그렇고,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훗날 주변의 증언을 종합하여 그날 밤 나의 행적을 재구성했더니 진상은 이랬다, 나는 그날 모인 사람들 중에서 유일하게 (멀쩡한) 미혼이었던 남자를 먹이로 점찍은 다음 독수리처럼 덮쳐서 포획, 납치하여 차 안에 가두고는 고백을 했으나 끝내 차였던 것이다(취중진담이라고 누가 그랬어,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이 술술 나오는데, 아니 나왔다는데).

<열한시>

남들은 감행하기까지 석달 열흘 걸린다는 거사를 열두 시간 만에 치르고는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버리다니, 과연 시시때때로 시간을 달리는 주정뱅이. 어떤 사람은 필름 끊긴 하룻밤을 끈질기게 추적하여 이상문학상을 받던데(이균영, <어두운 기억의 저편>), 내 어두운 기억의 끝은 이 따위 굴욕적인 문자나 받는 거로구나.

술을 마시고 깨어나면 내가 알지 못하는 미래에 와 있는 건 다행히도 나뿐만이 아니어서, 아마존 논픽션 부문 베스트셀러 1위에 빛나는 시리즈의 3권 <최악의 상황에서 살아남는 법3 - 서바이벌 핸드북, 데이트 & 섹스>는 이런 최악의 상황을 1장에 수록했다, 클럽에서 만취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한 침대에서 벗고 누워 있는 여자의 이름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최악의 상황은 이런 거야, 아침에 일어났는데 아는 여자하고 한 침대에서 벗고 누워 있는 거.

그리고 또 한명, 술병에 몸을 싣고 정처없이 시간을 여행하는 남자가 있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의 헨리(에릭 바나)는 꼬마 적부터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시간으로나, 진짜 몸만(그러니까 옷 한벌 없이, 그래서 시간 여행 스킬보다 달리기와 도둑질을 익히는 데 집중) 떨어지는 데, 술을 마시면 더욱 자주 여행하는 경향이 있다며 술을 끊으려고 한다. 그래, 멀쩡한 사람도 술 마시면 열두 시간 뒤로 떨어져서 고백할 마음이 생기기도 전에 차이기부터 하는데, 댁은 오죽하겠어. 사귀자고도 안 했는데 애인이 나타나고, 청혼도 하기 전에 이미 유부남. 이런 허망한 청춘을 술도 없이 보내느니 그냥 소주 한병에 2천원이던 시절로 돌아가 마음 놓고 마시고 말겠다, 어차피 취하면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는 것을.

사람이 술 좀 마시고 고작 열두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일일까 싶은 사람도 있을 텐데, 거기에 다시 열두 시간만 보태도 영화가 한편 나온다(그렇다고 하여 그 영화가 꼭 볼만하다는 뜻은 아니다). 제목에 상상력이라고는 없이 너무나 정직한 <열한시>, 오늘 열한시부터 내일 열한시까지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여 곧이곧대로 <열한시>, 하긴 <아가씨>도 아가씨 나온다고 <아가씨>고 <암살>도 암살한다고 <암살>이지만.

타임머신을 만들 정도로 똑똑한 과학자들이 스물네 시간 동안 하는 일이 너무 없는 것이 예상외의 반전이라면 반전이었던 <열한시>는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인간이 제아무리 잘나봤자 하늘이 내린 운명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구태여 노력하지 말고 되는 대로 살 것이며, 과정이 어찌 되었든 결과는 같으므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바람직한 가치관을 심어주는… 아, 이건 아닌가.

<백 투 더 퓨처>

어쨌든 결과를 바꾸려면 과정을 알아야 한다. <더 폰>의 동호(손현주)는 1년 전에 살해된 아내와 통화를 하게 되지만 아직 살인범을 잡지 못해 딱히 해줄 말이 없다(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강도가 들었던 집에 그렇게 혼자 있으면 안 된다는 충고 정도는 할 수도 있을 텐데. 포탄은 같은 자리에 두번 떨어지지 않는다는 삶의 지혜인가). 그렇다면 누가 살인범인지 어떻게 알아낼 수 있을까? 그렇다, 많은 한국 스릴러영화가 그렇듯, 두 시간에 걸친 주인공들의 삽질을 보다 못한 살인범이 “내가 살인범이다”라며 제 발로 나타난다.

이처럼 과거로 돌아가거나 과거에 간섭할 수 있다면 많은 걸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딱히 동호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나름 잘나가는 변호사라고). 오히려 <백 투 더 퓨처>는 미래가 바뀔까봐 동동거린다. 엄마랑 아빠가 어떻게 만났는지 뻔히 알면서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 나타나 엄마한테 백마 탄 왕자 노릇을 하는, 다행히 얼굴은 엄마 닮은 마티(마이클 J. 폭스), 눈치는 없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돈도 없고 잘 데도 없고 용돈 주는 엄마 아빠도 없는 과거에서 혼자 힘으로 먹고사는 기특한 젊은이. 아들을 낳으면 저런 아들을 낳아야겠… 아, 난 이제 안 되지, 과거로 돌아가지 않고서야.

그렇게 내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웬일인지 과거가 내게로 돌아오고 있다. 우리가 젊었을 때는 이렇게 힘들게 살았다고 나이 든 사람들이 그랬는데, 이왕 이런 일들을 겪을 거라면 차라리 젊어서 겪는 게 낫지 싶다. 옛날엔 밤새 초코파이 한개 먹고도 밤샘 집회 잘했지만 요샌 아스팔트 바닥 몇 시간만 깔고 앉아도 엉덩이에 자국 남는다고, 없어지지도 않아.

중년 아줌마 티를 팍팍 내면서 건강과 숙면에 좋다고 광고하던 편백나무 베개를 사서 자고 일어난 아침, 역시 건강과 숙면에 좋다지만 매우 불편한 베갯잇의 그물무늬 자국이 사라지지 않아 슬펐던 날의 푸념이었다.

그저 받아들이기

시간을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두세 가지 가이드

<천군>

역사를 안다

“열여덟 돌무치(하정우, 당시 나이 서른일곱)는…”이라는 <군도: 민란의 시대>의 내레이션이 관객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기 9년 전, (영화가 망해서) 많은 이와 더불어 웃지는 못했으나 이런 영화가 있었다, <천군>, 이순신(박중훈, 당시 나이 마흔)이 스물여덟살이라는 게 유일하게 웃기는 순간이었지(박중훈이 나와서 착각하기는 했지만 코미디영화 아님, <명량> 못지않게 비장하다). 어쩌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미스터리하게도 그 영화를 무척 아꼈던 어느 동료의 논증에 의하면 16세기 조선 양반의 평균 수명이 50살 남짓이었기 때문이다. “일찍 늙으니까 일찍 죽는 거야.” 늙기도 전에 죽어서 그런 게 아니고? 아무튼 과거로 돌아가면 아무나 아저씨 취급하지 말자.

<언니가 간다>

세월을 안다

남자는 스무살이 넘어도 계속 키가 큰다던데 <언니가 간다>의 오태훈(유건, 신장 180㎝)은 12년 뒤에 작(지만 돈 많)은 오태훈(이범수, 신장 171㎝)이 된다. 돈 버느라 고생했구나. 세월은 종잡을 수가 없고 인생은 난반사이니, 어른 나이가 되었다고 하여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나도 열여덟 적엔 내가 결혼도 못하고 직장도 없고 운전면허도 없는 데다 술만 마셨다 하면 시간을 달리는 어른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지.

<시월애>

복고를 안다

물리적으로 시간 여행은 미래로만 갈 수 있다지만, 과거로 돌아간다면 이런 걸 각오해야 한다.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고 하던데.” 이게 시대의 문제인가, 사람의 문제인가, 감독의 문제인가, 아니면 와인의 문제인가. “열여덟 돌무치” 못지않은 이 충격과 공포의 대사는 <시월애>의 성현(이정재)이 말하는 건데, 이게 현재로부터 고작 1년 전의 대사라는 것이 가장 충격과 공포다. 하긴 내년쯤 되면 <태양의 후예> 말투도 부끄러워지겠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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