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 때마다/ 아카시아꽃이 눈처럼 쏟아졌다/ 작은 꽃들이 하얗게/ 잡목으로 찌든 숲에/ 내 발길에 내려앉았다.”(시 <황방산의 달> 중에서) 전주에서 나고 자라 중년이 된 현재까지도 그곳을 떠나지 않은 이병초 시인은 어려서부터 보아온 산에 대한 시 <황방산의 달>로 문단에 나왔다. 데뷔부터 고향의 풍경과 추억을 노래한 그는 시작을 이어오는 와중에도 좀처럼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다만 그 풍경을 둘러싼 말들은 갈수록 다채로워졌다. 추상보다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다듬어진 표준어보다는 꾸밈없는 방언을 추구한 덕에 이병초 시 속의 고향 전주는 세월을 거듭하며 새로운 옷을 갈아입었다. 그의 시는 눈으로 훑을 때보다 입으로 읊을 때 보다 선명해졌다.
<살구꽃 피고>(2009) 이후 7년 만에 발표한 세 번째 시집 <까치독사>의 시편을 소리내어 읽어보면 전작과의 차이가 금방 떠오른다. 바로 거센소리와 된소리의 활용이 잦다는 것. 낭만보다는 각박함이 먼저 떠오르는 표제만 보더라도, 부드러운 말로 고향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첫 시집 <밤비>(2003)와의 거리는 뚜렷하다. 이미지 역시 마찬가지. 까치독사는 “숨통을 물어뜯”고자 낌새를 살피고, 파도는 몸을 날려 “산산이 박살”난다. 지난 시집 <살구꽃 피고>가 “옛 고향 이야기를 통해 각박한 삶을 건드리고 싶은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는 걸 떠올린다면, 그다음 시집 <까치독사>의 변화는 차라리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러는 와중, 20쪽에 자리한 <참살>(慘殺)에 도착하면 이와 같은 변화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깨닫는다. 현재를 사는 한국 사람이라면 평생 잊기 어려운 비극인 세월호 참사에 대한 시를 목도하며 야만적인 조국을 환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까치독사>의 이병초는 더이상 과거를 회상하며 미소 짓지 않는다. 지금을 버텨내는 절망을 거세게 외칠 뿐이다. “모두가 겪는 불편한 오늘”을 노래하기에, <까치독사>의 수많은 풍경들은 덜 분명하거나 덜 아름답다.
산과 산 사이 작은 마을 위쪽/ 칡넝쿨 걷어낸 둬뙈기를 둘러보는데/ 밭의 경계 삼은 왕돌 그늘에 배 깔고/ 입을 쩍쩍 벌리는 까치독사 한마리/ 더 가까이 오면 독 묻은 이빨로/ 숨통을 물어뜯어버리겠다는 듯이/ 뒤로 물러설 줄도 모르고 내 낌새를 살핀다/ 누군가에게 되알지게 얻어터져/ 창자가 밖으로 쏟아질 것만 같은데/ 꺼낸 무기라는 게 기껏 제 목숨뿐인 저것이/ 네 일만은 아닌 것 같은 저것이/ 저만치 물러난 산그늘처럼 무겁다.(14쪽 <까치독사> 전문)
마룻장 끝날이 햇살에 긁힌다/ 진분홍 꽃잎이 깜짝 벗어놓은 비늘 같은/ 얇디얇은 부름켜의 비릿함 같은// 자디잔 바람이 꽃잎이 펴듯 새촘새촘 꽃잎의 둥근 테를 혀로 감아올린 햇살이 불그죽죽한 귓불을 마룻장 끝날에 비빈다 보리티끄락같이 꺼끌꺼끌한 잔금들 쓸어모으는 내 여자의 눈그늘 안쪽, 목숨도 수세미수염도 못 밀어낸 맨샅 같은 눈그늘 안쪽, 그 독방에 들고 싶어서 햇살이 마룻장 끝날에 박힌다.(34쪽 <햇살>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