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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헤어짐을 기증하다
이다혜 2016-05-16

<실연의 박물관> 아라리오뮤지엄 엮음 / 아르테 펴냄

충무로 남산한옥마을에는 타임캡슐 광장이라는 게 있다. 서울이 수도로 정해진 지 600년을 기념해 1994년, 보신각종 모양을 본떠 만들어졌는데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600점의 물품이 담겨 있고, 2394년 11월29일에 개봉예정이다.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 목록을 보고 있자면, 벌써 낯설어진 삐삐가 있는가 하면… 학교 시험지와, 무려 정력팬티도 들어 있다. 1994년의 사람들은 그 시대를 보여주는 물건으로 정력팬티를 생각했던 걸까. 리스트에서 정력팬티를 발견하고 얼이 빠졌던 기억을 되살린 것은 설치미술가이자 사진작가인 소피 칼의 <시린 아픔>, 그리고 이번에 아라리오뮤지엄에서 엮은 <실연의 박물관> 두권의 책이다. 소설가 백영옥은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에서 실연의 기념품(차마 버리지 못한 채 가지고 있는 옛 연인의 물건들)을 교환하는 모임에 대해 쓴 적이 있었다. 소피 칼의 <시린 아픔>은 이별 극복기를 사진으로 작업해서 15년이 지난 후 책으로 묶은 것이다. 과거의 어떤 인연을 담고 있는 물건은 기능 이상의 존재가 된다. 기능 이상의 추억을 담은 정력팬티라니 별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실연의 박물관>의 부제는 ‘실연에 관한 82개의 이야기 헤어짐을 기증하다’이다. 글로벌 전시기획 <실연에 관한 박물관>의 2016년 한국 전시에 사연과 소장품을 기증한 82명의 사연을 모은 것이다. 여기 소개된 물건들은 실연이라는 말을 아주 광범위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야말로 인연을 잃어버리며 남겨진 사상자들의 집합소. 90년대 후반 대한민국 힙스터(사실 그땐 힙스터라는 말도 없었다)라면 누구나 갖고 있었던 로모카메라 같은 물건들도 있지만, 15년간 거짓을 말하며 바람을 피우고 폭행을 행사한 사람에게 보낼 고소장을 기증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15년간 가족을 태운 아버지의 코란도와 함께 고인의 아내, 딸, 아들이 쓴 편지가 소개되기도 하고, 큰 화상을 입고 9일간 화상치료를 받다 돌아가신 어머니 머리맡의 베개 커버가 보이기도 한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헤어진 연인들의 사연은 SNS에서 새벽 2시에 보게 되는 혼잣말같이 들리기도 한다.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구형 핸드폰에서 자신에게 쓰다 만 문자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버릴 수 없더라는 사연은 잊기 어려우리라.

<실연의 박물관>은 집에 있는 물건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죽은 이가 보낸 문자가 있어서 버릴 수 없는 옛 핸드폰도 있고,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가족의 젊음이 담긴 사진이며, 또 뭐가 있더라…. 구석에서 먼지 쌓이게 두지 말고, 저런 근사한 기획이 있는 줄 알았으면 제대로 기억될 기회를 선사할걸 하고 뒤늦게 후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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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짐을 기증하다 <실연의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