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감독은 자신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자에게 꽤 오랫동안 시달린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믿어주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벌을 내리는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으리라. <곡성>은 믿음에 관한 영화다.
마을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살인사건들이 잇따라 벌어진다. 가해자들은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에 하나같이 피부병을 앓고 귀신에 들린 것 같은 행동을 했다. 주인공은 경찰이다. 얼마 전부터 마을에 일본에서 왔다는 정체불명의 사내가 출몰하고 있다. 일본인에 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많다. 주인공은 이 일본인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는다. 그러다 주인공의 딸이 피부병과 귀신들림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주인공은 다급해진다. 주인공은 일본인을 찾아가 마을을 떠나라고 협박한다. 딸을 구하기 위해 용하기로 소문한 박수무당이 마을에 도착한다.
<곡성>은 다 보고 나서도 꽤 많은 수수께끼를 남기는 영화다. 황정민이 돈벌이를 위해 악령을 불러들인 것인가, 아니면 같은 미놀타 카메라를 사용하고 훈도시를 입는 둘이 처음부터 협력한 것인가, 왜 곡성 지킴이 천우희는 일본인을 귀신으로 단정지으면서도 주인공에게 죄없는 사람을 의심해서 죽게 만들었다고 말했나.
주어진 상황만 가지고 판단할 때 딸을 해한 건 일본인이 아니라 황정민이며 굿판 대결은 편집이 그렇게 되어 있을 뿐 서로 다른 대상을 향한 굿이었다는 것, 딸을 해함으로써 주인공이 일본인에 대한 증오를 폭발시키게(미끼를 ‘삼키게’) 황정민이 의도했다는 것, 일본인과 황정민은 같은 종류의 수련을 받은 것인지는 몰라도 어찌됐든 동일한 방식으로 영을 수집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고 황정민은 주인공의 영을 확보하고 일본인은 끝내 악마로 각성하는 데 성공한다는 것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곡성>에서 이와 같은 사실 관계를 정리하는 작업은 관객의 사후 유희를 제외하면 별 의미가 없다. 이것은 모두 애초 감독이 의도하고 의뭉스럽게 흩뿌려놓은 이야기다. 결국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는 태도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의 비전이 집중력 있게 주력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건 오로지 곡성 지킴이 천우희의 말을 믿지 못하고 정황에 현혹되어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주인공의 선택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되돌릴 수 없는 파국적 결말을 맞는다. 가혹하다.
믿음에 관련해 이 영화는 시작부터 끝까지 기독교 인용을 꽤 많이 하는 편이다.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한 후 제자들이 의심하자 이를 꾸짖는 대목을 직접적으로 인용하고 악마로 각성해 부활한 일본인이 성흔을 드러내면서 사제를 희롱하며 천우희는 닭이 세번 울 때까지, 라는 조건을 달아 상대의 믿음을 시험대에 올린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믿을 것을 종용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이는 건 인간에게 너무 버거운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곡성>이 보여주는 비극은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인간에게 애초부터 내재되어 있는 한계로부터 의 어쩔 수 없는 결말에 가깝다.
<곡성>에서 배우들의 연기는 곽도원부터 김환희에 이르기까지 균질하고 흠잡을 데가 없다. 현장에서 잘 조율된 결과물이라는 티가 많이 난다. 구니무라 준의 존재감은 각별하다. 원안대로 기타노 다케시였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으나 끝까지 보고 생각을 고쳤다. 그중에서도 황정민이 대단하다. 이건 기록될 만한 연기다. 역할 때문에 그저 밖으로 내지르는 장면들이 먼저 눈에 들어오겠지만 영화가 진공 상태에 빠졌을 때마다 디테일을 채워주는 건 거의 다 황정민이다. 영리한 배우다. 분량과 상관없이 말이다. <죠스>에도 정작 상어는 몇분밖에 나오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오컬트 한•일전, 조선 <컨저링> 같은 우스개를 몇 가지 떠올렸지만 금방 지워버렸다. <곡성>은 장르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기존 관객에게 익숙할 만한 장르적 해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대신 상황의 현실적인 면모와 일상성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곡성>은 살인과 영적 능력, 귀신, 귀신들림, 엑소시즘, 살아 있으면서도 죽은 사람, 위악적일 정도로 많은 성경 인용, 샤머니즘 등의 장르적인 소재를 엄청나게 쏟아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본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같은 종류의 소재를 다룬 호러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을 <곡성>에서 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컨저링>과 <곡성>은 유사한 갈등 양상을 보여주지만 구조와 분위기는 완전히 정반대를 향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즉 이 영화에서 공포의 순간은 관객이 예상할 만한 순간에 예상할 만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장르적인 공식 안에서 운용되기보다 극중 현실 안에 그냥 ‘발생되어’져 있다. 나는 악이 어떤 사연과 이유를 가지고 탄생하는 게 아니라 그냥 발생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가 꽤 좋아하는 괴담의 마지막에서 “대체 왜 나냐”는 희생자의 절규 앞에서 귀신은 이렇게 말한다. “그냥.” 그런 종류의 우연과 무작위성이야말로 공포를 배가시킨다. 아귀가 딱 들어맞는 설명은 음모론이나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지, 대개의 경우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기껏 쌓아올린 서스펜스와 공포를 마지막에 설명 가능한 사연을 통해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영화들을 수없이 많이 보아왔다.
<곡성>이 장르적인 소재들을 일상의 맥락 위에 별 이상할 것 없다는 식으로 포섭하는 태도는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의 공기와 닮아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에서 악은 공포를 만들어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냥 영화 속 현실 안에 스며들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별다른 무대장치나 효과 없이 귀신이나 살인이 등장해 영화의 분위기를 묘하게 정적으로, 그러나 참을 수 없이 무섭게 만든다. <곡성>은 우리에게 익숙한 지방색과 배우들의 탈장르 연기를 통해 일상성을 구축하면서 그 위로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을 아무렇지 않게 배치하여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에서 보았던 효과들을 폭발적으로 배가시킨다.
그래서 <곡성>은 시종일관 매우 이상한 공기를 뿜어낸다. 이건 매우 이상한 영화다. 지금이라서 더욱더 이상한 영화다. 한국영화가 급속하게 산업화되고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시장적 면모를 갖추면서 2000년대 중•후반 이후로 사라졌던, 바로 그 불온하고 기이한 에너지가 고스란히 발견된다. 이러한 에너지를 계속 가지고 작업할 수 있는 감독은 지금 한국에 몇명 남아 있지 않다. 이 ‘불온하고 기이한’ 영화가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꽤 많은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는 현상이야말로 <곡성>과 관련해 벌어진 가장 이상한 일임에 틀림없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최근 수년째 서로 크게 별다를 것 없는 기획성 영화들이 한국영화의 팔할을 차지하고 있다는 피로도와 그에 대한 반작용이 낳은 결과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같은 영화를 보고 그것의 이상하고 불온하며 무시무시한 지점에 관해 갑론을박하고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즐거움을 우리는 너무 오래 잊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