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제4회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화제작은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이었다.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등급보류 판정을 받은 관계로, 개봉관에서는 못 볼지도 모르는 무삭제 상영이라는 것이 예매 시작 20분 만에 매진되도록 만들었다. 3회 이상 개최된 영화제에 한해서는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등급을 부여받지 않은 작품도 상영이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현행 관련 법령에 따른 것이었다. 아예 등급부여 심의 자체를 거부해온 인권영화제를 제외하면, 국내 영화제가 등급보류 조치로 인해 일반 상영관에서 상영 불허된 작품을 상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물론 영화제쪽의 자체 연령제한 규정에 따라 18세 이상의 관객에게만 관람이 허용됐다.
당시 폐막을 이틀 앞둔 10월21일자 <씨네21> 부산국제영화제 공식데일리 8호를 보면 “18세 이상 관객만 입장시키기 위해 일일이 신분증을 확인하고, 미처 입장권을 발급받지 못한 100여명의 게스트를 들여보내는 데 시간이 걸려 예정시간보다 30분가량 늦게 상영을 시작했다”고 한다. “<거짓말>을 상영한 665석짜리 대영극장 3관은 좌석 사이의 통로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이 관객이 들어서 영화를 봤는데, 입장객은 900여명으로 추산된다”고도 했는데, 나는 용케 티켓을 구한 친구를 밖에서 기다리며 그저 남포동을 떠돌던 학생 중 하나였다. 비록 상영관에 들어가진 못했지만 그를 통해 그날의 ‘소동’에 대해서도 들을 수 있었다. 길게 줄을 늘어서 입장을 요구하는 게스트들과 자원봉사자들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고, 상영 후 GV 때도 관객과의 대화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할 만큼 수많은 취재진으로 대혼잡이 빚어졌다. 당시 GV를 진행하던 이용관 프로그래머는 정의감에 불탄 나머지 장선우 감독과 주연배우인 김태연, 이상현과 관객 사이에서 거의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취재진을 제지하던 중 그만 ‘충돌’을 빚고 말았다. 취재보다 현장 관객과의 대화가 더 중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다음날 데일리에는 “촬영 중이던 취재진을 제지하던 상황에서, 장내 진행요원들에게 전달했던 발언이 본의와 다르게 카메라 기자들에게 전달된 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라는 요지의 부산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의 사과문도 실렸다. 하도 기자들이 난리를 쳐서 그런 일이 벌어졌을 테니, 관객을 위해 대신 싸워준 이용관 프로그래머가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하는데 힘까지 세구나’ 하는 생각에 참 멋져 보였다. 이번호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켜주세요’ 캠페인에 원고를 보내준 조영각 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에 따르면 오래전 ‘와이드앵글 파티’의 뒤에서도 그가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한다. ‘산전수전 다 겪었다’는 말은 진짜 이럴 때 쓰는 거다. 그런데 최근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진정 예의를 잊어버린 것 같다. 이번호 국내뉴스 ‘한국영화 블랙박스’에서 조종국 편집위원이 지적한 것처럼,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와 부산시는 김동호 명예집행위원장이 조직위원장을 맡아 현 상황을 수습하고 영화제 개최를 합의했다고 했지만, 그 어떤 보도자료와 기사에서도 ‘이용관’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조종국 위원의 말처럼 “부디 이 칼럼이 머지않아 부산시의 선의와 김동호 위원장의 역량을 오판한 글로 판명되어서, 사과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명백히 이용관 전 위원장에 대한 ‘정치적 살인’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진정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