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을 줄 알게 된 이래로 나는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밤새 책을 읽게 만든 셜록 홈스 시리즈, 용돈으로 한권씩 사모으던 해문의 애거사 크리스티 전집, 그리고 (지금 와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두뇌 계발에 좋다던 미스터리 퀴즈 모음집, 성교육 교재를 대신했던 시드니 셸던의 반전 멜로 미스터리 서스펜스 소설(드라마로 치면 막장 드라마였다)들까지. 그러다 잡지 말미 일종의 게시판 코너에 글을 싣게 되었는데, 추리소설을 바꿔 보고 예쁜 엽서를 교환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아저씨들과 바꿔 본 소설들은 충격과 공포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은 식이며, 대체로 엇비슷했다. 남자주인공은 아내 혹은 딸을 강간살해로 잃은 뒤 복수하기 위해 원수의 아내 혹은 딸을 강간살해한다….
추리소설이라는 대분류 안에는 무수한 세부 장르가 있다. 그리고 현대 스릴러물에 가까울수록, 범인의 잔인함과 영리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로 탐정이나 형사 주변의 여자들이 수난을 겪는 일이 많다. 영화로 예를 들자면, <세븐>이 대표적이다. 미드 <멘탈리스트>의 경우는 남자주인공의 아내와 딸이 죽어서 그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크리미널 마인드>에서 프로파일러 하치의 아내는 이혼까지 하고도 죽임을 당한다. 심지어 만화 <명탐정 코난>이나 <소년탐정 김전일>에서도 주인공들의 여자친구인 란과 미유키가 위기에 빠지곤 한다. 남자친구가 뛰어난 탐정이기 때문이다.
실제 살인사건 기록에 토대를 두고 쓰였다는 마옌난의 <사신의 술래잡기>는 탐정 모삼과 법의관 무즈선이 콤비가 되어 사건을 해결한다. 기억을 잃은 모삼은 어느 살인사건 현장에서 기억의 편린을 찾은 후 무즈선과 재회하고 사건에 개입하게 된다. 모삼이 기억을 잃은 이유는 곧 밝혀지는데 그의 연인 관팅이 강간살해당한 현장에 그도 있었으며, 그 역시 살인범의 칼에 크게 다쳤다는 것이다. 사건의 세부사항은 너무 잔혹해서 옮겨적기도 꺼림칙한 정도. 살인범이 낸 퀴즈를 차례로 풀어가는 구성과 사건들의 트릭을 밝혀내는 부분들은 흥미진진하다. 귀신 나오는 집의 트릭은 추리소설 애독자라면 예측하기 쉽지만 제법 근사하게 연출되었다. “법의학에 관한 재능은 그의 얼굴만큼이나 우수하기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부잣집 도련님 무즈선의 활약상은, 모삼과 상호 보완 관계에 있으며, 코미디를 담당하는 오팀장의 캐릭터 역시 잘 잡혀 있다. 하지만 모삼의 죽은 연인에 생각이 미치면 왜 탐정을 자극하기 위해 주변의 여자들이 고통받아야만 하는가에 생각이 미치고 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