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분노하고 있다. 마감에 맞춰놓은 다른 주제의 칼럼을 폐기하고 이 글을 쓰고 있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 나의 분노는 넷플릭스에 대한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의 행태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넷플릭스에 가입해놓고 첫달만 반짝 보고 그 뒤로는 다달이 돈만 내고 있는 부르주아 가입자다. 가장 큰 이유는 대표 콘텐츠들이 이미 접해본 것들이기도 하고 어쨌든 가입한 이상 그곳에 가면 그것은 언제나 그곳에 있을 터이니 내가 부지런을 떨지 않아도 됐던 이유도 있다. 그런 와중에 잠 안 올 때 짬짬이 보던 <브루클린9-9>이 내려갔단 소식을 들었다. 이미 해치워버린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도 내려갔다는데 영등위에서 재심사에 들어갔다니 뭐 거기까진 그러려니 했다. 절차상 착오가 있었나보다. 하지만 내 분노는 블러가 등장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렸을 때 했던 경험 중엔 그런 게 있다. 가족들과 함께 TV를 보다 느닷없이 야한 장면이 나왔을 때 침조차 꿀꺽할 수 없는 숨막힘. 우리집은 대가족이라 그 숨막힘은 더더욱 밀도감이 있었고 그 와중에 우리 엄마의 교육철학은 보는 게 뭐 어때서 주의라 오히려 내쪽에서 제발 그런 장면이 나오지 않길 기도하는 심정이었다. 그렇게 커오다보니 자연스레 TV를 통한 교육은 으레 가정 안에서 각자의 철학으로 해결하는 영역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때문에 시청자 연령제한이라는 제도가 생겼을 때 그 실효성에 의문을 품었다. 처음엔 그저 지나가는 일이려니 했다. 담배에 블러가 나올 때도 칼에 블러가 나올 때도 너무 표피적이고 우스꽝스러운 덧칠이라 누가 이걸 계속 볼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마치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나 송창식의 <왜 불러>가 금지곡이었던 이유가 지금은 코미디로 회자되는 것처럼 이 모든 행태들도 얼마나 코미디인지 당국이 금세 깨닫게 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이 짧았다. 담배를 들고 있으면 오케이지만 빨면 블러당하는 지경까지 왔다. 그것도 성인들만 보라는 19금 콘텐츠에서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이 모든 것이 눈가리고 아웅이라는 증거는 곳곳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미디는 계속되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같은 돈 주고 더 많은 콘텐츠를 즐기는 것도 억울해죽겠는데 단지 이곳에서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적은 콘텐츠 안에서 혹시라도 우리가 나쁜 물이 들까봐 블러까지 당하는 모욕을 당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영원히 성인이 되지 못하고 영원히 미성숙한 존재로 머물게 된다. 난 37년이나 살아온 성인이고 스스로의 철학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권리가 있다. 하물며 그게 날 파괴할지라도. 침해당한 권리에 대한 모욕감으로 정신을 잃은 나는 자존심을 회복할 다른 정신승리를 발굴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음모다. 넷플릭스에 대항하기 위한 다른 콘텐츠 서비스업체들의 로비의 산물이다. 그렇게 따지면 내 모욕감은 넷플릭스가 업계에서 영향력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상상은 결국 특정 업체의 이익이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한다는 영등위 철학에 대한 좌절감으로 이어지고 만다. 자. 선택이다. 모욕감이냐 좌절감이냐. 둘 중 택일은 짬짜면 같은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가혹한 형벌이다. 결국 난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한 채 저항을 고민한다. 규칙도 통제도, 동시에 질서도 없는 드넓은 인터넷의 바다에 뛰어들어 비합법적으로 콘텐츠를 즐길 것인가. 이 글은 공식적으로 <씨네21>에 실리는 글이기 때문에 내 결정까진 쓰지 않고 이쯤에서 맺겠다. 여전히 모욕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