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윤모 집행위원장(가운데)과 홍보대사 부지영 감독(왼쪽)과 채현국 효암학원 이사장(오른쪽).
2000년대 후반 독립다큐멘터리에서 몇몇 장소가 주요한 의제로 떠올랐다. 그 장소에서 소수의 주민이 정부의 국토 개발 사업에 맞서 힘겹게 투쟁했고, 카메라는 그들 편에 있었다. 제주 강정마을은 미군 해군기지 건설로 자연이 훼손될 위기에 처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투쟁해온 장소다. 강정마을의 투쟁은 이에 동조한 타지 주민들이 합세하면서 지역 내부의 투쟁을 넘어섰다는 의미도 지닌다. 비록 투쟁은 해군기지 건설을 막아내지 못했지만 작은 영화제 하나를 피워냈다. 강정국제평화영화제가 4월23일(토)부터 26일(화)까지 4일간 열린다. 당초 영화제 장소로 서귀포예술의전당을 예정하고 있었으나 당국의 비협조와 부당한 탄압으로 사용이 어렵게 됐다. 하지만 영화제 조직위원회는 모든 논란과 탄압에도 불구하고 강정마을 일대에서 꼭 성공적으로 치러낼 생각이다. 정부단체나 민간기업의 후원을 받지 않고 자발적 시민 모금 형태로 꾸려진 이번 영화제에는 총 34편의 영화가 무료 상영된다. ‘기억 투쟁으로써의 영화’, ‘강정-오키나와 섬들의 연대’라는 주제의 포럼을 통해 영화제의 의미를 다진다. 청소년들을 위한 강정평화영화학교도 마련된다. 봄 학기에는 영화제 작품 감상, 포럼 참석 및 작품기획 워크숍, 가을 학기에는 작품제작 워크숍 및 멘토링, 작품 상영 및 관람, 포럼 참여, 졸업식으로 일정이 마련됐다. 참여하는 학생들은 영화를 만드는 동안 매달 워크숍을 통해 영화감독들의 멘토링을 받게 된다.
상영작들은 기개봉작이거나 다른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영화제의 의미는 새로운 영화를 발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소개된 영화들을 모으고 재검토하는 데 있다. 영화제는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한 명확한 현실인식을 촉구하는 다큐멘터리 <업사이드 다운>으로 문을 연 뒤, 오키나와 미군 주둔기지 건설 반대 투쟁을 기록한 <우리 승리하리라>로 마무리한다. 두 다큐멘터리를 처음과 끝에 배치한 것에서 제주를 기점으로 국내외 투쟁 장소들을 연결하려는 지정학적 의미가 읽힌다. 세월호-강정-오키나와 외에도 송전탑 반대투쟁 장소인 밀양(<밀양 아리랑>)과 3•11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한 원전 사고를 겪은 후쿠시마(<에어> <후쿠시마의 미래>) 등이 지리적으로 얽혀든다. 한-일간에 여전히 첨예한 문제인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도 검토한다. <소녀이야기> <그리고 싶은 것> 등 위안부 할머니들의 과거와 현재를 그린 작품부터 <레드마리아2> 등 위안부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 확장적으로 사유하는 작품들이 상영된다.
대구 지하철 참사 이후를 말하는 <탈선>은 한때 전 국민의 이목을 끌었던 사건들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그저 시간이 흘러 잊혔을 뿐이란 걸 일깨운다. <나의 하루>와 <강정 오이군>은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을 바라보는 젊은 감독의 대조적 시선이 인상적이다. <나의 하루>에서 감독은 경찰의 편에서 개발을 진행하는 초능력자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설정한다. 감독은 한손에 카메라를 든 채 다른 손으로 카메라 앞에서 손 연기를 펼친다. 커다란 손과 축소된 포클레인으로 관객의 시선을 교란하면서 사건을 자기화하는 동시에 허구화한다. <강정 오이군>은 점토로 만든 캐릭터 오이군의 시선으로 투쟁을 바라본다. 오이군을 통해 함께 있지만 어딘가 이질적인 존재, 다른 이들보다 한발 늦은 이들의 상황과 심리를 보여준다. 마카오, 장건문 감독의 <소설무용>은 지금까지 언급한 맥락에서는 조금 독특한 작품이다. 영화는 중국어, 영어, 포르투갈어, 한국어 자막을 동시에 제시한다. 자막의 속도는 따라잡기 어려울 만큼 빠르다. 이민자의 복잡성과 좌절감이 영화 형식에 녹아든다. 자막의 홍수와는 대조적으로 말없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이민자-인터뷰이들의 시선은 어떤 말보다 굳건한 항변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