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청부업자 올라브. 마약 거래, 포주, 은행강도 어느 것도 적성에 맞지 않은 탓에 킬러가 된 그는 주변에 마음 붙일 만한 사람 하나 없지만, 그럭저럭 제 삶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보스 호프만은 올라브에게 자신의 젊은 부인 코리나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코리나를 감시하던 올라브는 그녀가 어떤 남자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어머니를 떠올리고, 남자를 죽이고 코리나를 구해낸다.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커버 속 시퍼런 권총의 이미지가 표상하듯, <블러드 온 스노우>는 요 네스뵈가 쓴 펄프 픽션이다. 범죄소설의 클리셰가 여기저기 산재된 가운데, 윗선의 명령에 등 돌린 채 금지된 사랑에 뛰어든 한 남자의 뜨거운 로맨스가 시치미 뚝 떼고 펼쳐진다. 하지만 민망함에 책을 덮지는 않을까 걱정할 필요 없다. 평소 벽돌책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요 네스뵈 책들 분량의 반절도 되지 않는 <블러드 온 스노우>는 한껏 간결해진 페이지만큼이나 높아진 밀도로 독자를 포박한다. 실제로 요 네스뵈는 이 소설을 미국에서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 중에 써냈다. 작가가 한나절 동안 쏟았던 흥분은 새하얀 눈밭을 물들이는 피가 되어 독자를 흠뻑 적신다.
<블러드 온 스노우>는 요 네스뵈의 비블리오그래피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를 세계적인 인기 작가로 올려놓은 ‘해리 홀레’와 기상천외한 동화 ‘닥터 프록터’에 이어 새로운 시리즈 ‘올라브 요한센’의 신호탄 격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여러 자리를 통해 흠모를 고백했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컨버세이션>과 <대부>가 탄생한 1970년대에 초점을 맞춰 펼쳐질 이야기들은 미래를 기대하던 낭만과 냉전이 한창인 시대의 음울한 분위기가 주가 될 것이라고. 요 네스뵈가 거의 모든 소설에서 선보였던 노르웨이 오슬로의 찬 공기가 이미 익숙한 팬들에겐 그리 낯설지 않은 세계일 것이다. 서서히 여름의 기운이 짙어질 즈음, (우리나라에서는 ‘오슬로 1970’로 소개될) ‘올라브 요한센’의 두 번째 책 <미드나잇 선> 한국어판이 발매될 예정이다.
작가가 한나절 동안 쏟았던 흥분
나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내 어깨가 따뜻해졌다가 그녀의 눈물로 다시 차가워질 때까지 계속 끌어안고 있었다. 그제서야 라이터가 보였다. 그것은 빈 피자 상자 위에 있었다. 지금까지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었다면 이제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녀는 CP 스페셜을 좋아한다. 날 좋아한다.(123쪽)
지금 소리를 지르지 말아야 할 논리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더 완벽한 순간, 다른 모든 순간들의 틈새에 끼어 있는 특별한 순간이 있을 것만 같았다. 스키 스틱을 아버지에게 내리꽂았을 때처럼. 책에서 작가가 정확히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정하는 것처럼. 작가가 일어날 거라고 이미 말했기 때문에 일어나리라는 걸 알지만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 왜냐하면 사건이 일어나야 할 적합한 장소가 있고, 따라서 조금 기다려야 일이 올바른 순서대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시계가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꽉 눌린 용수철, 아직 고드름 끝에 매달린 물방울.(1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