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책이 그 안의 내용은 물론 표지의 이미지와 재질, 두께가 서로 제각각이듯, 이야기 하나하나가 책으로 세상에 나오기까지 걸리는 시간도 저마다 다르다. 소설 <블러드 온 스노우>, 에세이 <삶의 끝에서>, 그림책 <위니를 찾아서>, 4월 북엔즈에 놓인 다른 장르의 세책 역시 마찬가지다.
1997년부터 거의 매해 500페이지 이상의 새 책을 발표해온 노르웨이의 이야기꾼 요 네스뵈는, 차기작 속 주인공의 대표작으로 설정했던 소설 <블러드 온 스노우>를 비행기 안에서 써내려가 12시간 만에 완성해냈다. 평생 학생들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던 교사 다비드 메나셰는 병마와 싸워가며 교편을 지키다 망가진 몸을 이끌고 4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여행했다. 그 과정에서 옛 제자들을 만나고 자기 삶을 돌아본 이야기는 <삶의 끝에서>라는 에세이로 남았다. <위니를 찾아서>의 작가 린지 매틱은 아들 콜에게 들려줄 이야기로, 가족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곰돌이 푸’의 연원을 더듬을 수 있는 책을 썼다.
요 네스뵈의 가장 얇은(그래도 200페이지다!) 책 <블러드 온 스노우>는 언제나 그렇듯 오슬로를 배경으로, 70년대 한 킬러의 로맨스를 그렸다. 작전의 타깃이자 보스의 아내인 여자에게서 모진 생활을 감내하던 어머니를 떠올리다 그만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사내의 사연. 분명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연애담은 (건조하기 짝이 없는 작가의 전작들과 달리) 오슬로의 한기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감정으로 뜨겁다.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끄떡없이 타오르는 주인공 올라브의 마음은 그야말로 끝까지 간다.
시한부라는 의학의 판단이 무색하게도 이후 생의 끈질긴 의지로 8년의 새 삶을 산 다비드 메나셰. 그는 죽음을 손꼽으며 불안에 떨기보다 지난날과 앞날을 떠올리고 지금을 충실히 살았다. 그런 그에겐 거짓말처럼 계속 내일이 찾아왔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교사를 놓고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난 다비드 메나셰는 눈감는 그날까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여, 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책 <삶의 끝에서>는 희망으로 가득하다.
그림책 <위니를 찾아서>에는 ‘판타지’와 ‘당대의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작가이자 화자인 엄마가 아이에게 나긋나긋하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마음을 열고 눈을 크게 뜨면, 작가가 슬쩍 감춰놓은 “우리 모두 특별한 사람”이라는 당부가 들리고, 제1차 세계대전을 통과하는 세상의 황폐함이 보이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