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21>은 1049호부터 부산국제영화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요구하는 문화예술인들의 지지 캠페인을 매주 실을 예정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는 2004년부터 시작된 ‘시네마 투게더’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평범한 영화제 관객이 영화감독을 비롯해 배우, 작가, 평론가 등 영화 및 문화계 인사들과 함께 영화를 보고 대화를 나누는 인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사라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2008년 시네마 투게더 초청자였던 김경주 시인의 글을 싣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난생처음으로 소매치기를 당했다. 2008년에 겪은 일이다. ‘시네마 투게더’라는 행사에 초청받아 며칠간 관객과 함께 영화를 보고 GV(관객과의 대화) 행사에 참여하는 일정 중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날 밤 <백만번 산 고양이>라는 다큐멘터리영화를 보고 나는 취했다. 영화가 너무 아름다웠고, 영화가 데려다준 그 품으로 들어가 지인들과 늦게까지 해안도로 근처에서 술을 마셨다. 내 털은 부드럽게 바닷바람에 휘날리곤 했다. 처음엔 옆에 둔 가방의 옆구리가 터진 줄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얇은 칼날이 옆구리를 찢고 지나간 흔적이 보였다. 안에 든 지갑과 카메라까지 몽땅 털어간 것이다. 경찰서에 신고를 하러 가니 나처럼 여기저기에서 소매치기당한 사람들이 얼추 열명은 되어 보였다. 모두들 줄 서서 씩씩거리며 소매치기 경위에 대한 기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점점 알려지고 국제행사가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영화제 기간 동안 소매치기가 몰려든다는 경찰관의 말에 사람들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이놈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영화제 때문에 오는 사람들을 노리기는 하는데 놈들도 기간 동안 영화는 제법 많이 보는 것 같아요. 안으로 들어가면 위험하지만 더 분명해 보이는 게 있나봐요. 우리쪽에서 생각할 때 소매치기가 순수 내수는 아닌 것 같고, 아마 국내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중에 손기술을 가진 놈들이 이 기간이 되면 영화제 와서 자기 고향 이야기 나오는 영화도 볼 겸 옛 재주로 마음이 들썩이는 것 같기도 하고요.”
타국의 소매치기가 비행기나 배편을 이용해서 한탕(?) 하려고 부산까지 몰려든다는 상상을 하니 헛웃음이 나왔다. “다들 먹고살려고 참 애쓰는구나.” 아마 부산국제영화제가 덜 알려졌거나 내가 가방을 배꼽쪽으로 돌려놓았다면 내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건을 소매치기당했다는 사실에는 화도 나고 불편한 것도 많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먹기로 결심했다. “그 소매치기는 나를 타깃으로 놓은 후부터 하루 종일 나와 함께 같은 극장에서 영화도 보고, 밤바람에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같이 글썽거리다가, 마지막엔 이를 악물고 제 할 일을 하고 간 것뿐이라고.”
영화제는 평상시에는 잘 만날 수 없는 나와 그들을 한곳으로 불러모으는 공존지 같은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칸국제영화제 기간에는 전세계의 소매치기가 다 몰려든다는 뉴스를 혼자 보쌈정식을 먹으면서 보았다. 소매치기들만큼 영화제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도 드물 것이다. 소매치기가 슬쩍해간 물건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법은 없다. 소매치기는 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피해자와 상실은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세상처럼. 흔적은 남기고 있지만 위치와 장소가 늘 불분명한 그들만의 세상처럼. 부산국제영화제가 계속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그중에 나는 소매치기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영화제가 존속해야 한다고 믿는 쪽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사라질 위기라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면 그들은 손에 쥐가 날 것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뜻있는 자들끼리 팀을 꾸리고 제작비를 마련해 여기까지 온 그들에게 관객을 못 만나게 하는 것만큼 비인간적인 것도 없을 것이다. 그건 정말 영화를 하나도 모르는 나 같은 인간들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분노할 일이다.
그들도 먹고살아야겠지만 슬쩍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아만 준다면 이 또한 공존의 미덕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