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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정의 다른 나라에서] 기억 나? 한때 우리가…
글·사진 이화정 2016-04-15

<비포 선셋>

그러고보니 1997년 9월13일 피카디리극장에서 <접속>을 보고 헤어지며, 몇년 후 다시 그 앞에서 만나기로 한 남자가 있었다. LA에 적을 둔 그 남자는, 연락처를 교환하는 대신 그런 영화 같은 만남을 제안했었다. 지나고 보니 그때 우린 참 ‘<비포 선라이즈>적’인 연애모드를 가동 중이었나 보다. 서울과 LA간에 펼쳐진 그 거리, 카톡도 페이스타임도 없던 90년대의 그 연애가 남긴 약속은 미련이었을까, 아님 어떤 기대였을까.

무수한 ‘단기연애’ 연인들에게 이렇게 기약 없는 운명론을 제시해준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에단 호크)와 셀린느(줄리 델피)는, 커플들이 그 애매한 약속을 까맣게 잊고 다음 연애로 돌입한 9년 후 느닷없이 만난다. 이 만남에서는 “혹시나 너랑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너를 주인공으로 소설까지 썼다”는 제시의 늦은 고백보다, 그가 강연에 온다는 정보를 한달 전에 알고 챙겨두었다가 그곳에 나타난 셀린느의 용기가 100배쯤 가상해 보였다. 출판 강연회라는 버젓한 명분이 있는 그 남자에 비하자면, 그녀의 출현은 100번의 고민을 거친 결과였으리라. 그건 상대가 그때 만남의 장소에 오지 않았을지도, 더이상 여행지에서 가졌던 열정으로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래서 이 뒤늦은 만남이 서먹해질지도 모르는 불편한 가정에 대한 적극적인 대항이었다.

리처드 링클레이터만큼 사랑의 시간에 있어서 공간이 차지하는 절대적 비중을 잘 알고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감독이 또 있을까. 그렇게 어렵게 9년의 갭을 건너온 셀린느가 제시를 가이드한 그 거리가 한층 더 각별해지는 이유다. 우연한 만남으로 시작된 여행, 둘이 함께 걸었던 장소들을 영화의 마지막에 몽타주로 보여주던 <비포 선라이즈>와 달리 <비포 선셋>에서는 반대로 셀린느가 앞으로 제시와 걸어갈 10여곳을 영화 시작에 먼저 보여준다. 어느 쪽이나 ‘비포 시리즈 관광엽서’ 같은 구성이라 가보고 싶게 만드는 곳들이다. 그리하여 언젠가 <비포 선라이즈>에서 둘이 사랑을 나눈 오스트리아의 프라우터 공원에 갔을 땐 셀린느가 “그날 우리 두번이나 (섹스를) 했다”고 기억하는 잔디를 찾느라, 앙코르와트의 사원에 가 <화양연화>의 양조위가 사랑의 슬픔을 묻은 ‘그’ 구멍을 찾겠다고 매달리는 것 같은 곤란한 기억이 난다. 그 편에 비해, <비포 선셋>에서 두 연인이 재회의 시간을 만끽하는 파리의 르 퓨어 카페는 버젓이 주소를 가지고 있는 데다, 꽤 괜찮은 브런치 메뉴와 커피를 마실 수 있으니 파리에 간다면 찾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이는 공간이다.

<비포 선셋>

제시가 강연을 마친 고서점 셰익스피어앤드컴퍼니에서 셀린느와 함께 나온 시간이 5시30분을 훌쩍 넘긴 시간. 출판사 담당자가 공항으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 시간은 7시30분. 제시가 15분 전에는 다시 대기 중인 운전사에게 돌아오겠다고 했으니, 둘에게 허용된 시간은 9년의 간극을 메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라지 싶은 1시간30분 정도다. 영화 촬영 당시 해가 지기 시작했다지만, 한낮에 38도를 웃돌던 파리의 여름, 셀린느가 그 짧은 시간에 제시를 데리고 걸어서 10분도 더 걸리는(물론 영화적 시간이고 실제 거리는 훨씬 더 멀다) 르 퓨어 카페까지 간 건 왜일까. 짐작건대 셀린느는 제시의 비행 스케줄을 듣고, 르 퓨어 카페에서 보내는 시간이 어쩌면 그들 만남에 허용된 ‘전부’일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카페는 그들의 지난 공백, 그리고 앞으로 다시 오지 않을 만남을 정리하는 제법 각별한 장소가 된다. 그건 마치 그녀가 오래전 연인을 만나는 단 하루에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 하는 실용적 고민과도 맞물리는 선택이다. 너무 멋내서도 안 되고, 너무 편해서도 안 되며, 너무 올드해 보여서도 안 되었다. 그렇게 편안한 차림이되 재킷을 벗으면 뒤가 트인 레이스 민소매 차림으로 무심한 듯 여성스러움도 놓치지 않고 한껏 강조한 셀린느의 그날 의상처럼, 잠깐이지만 함께 들르는 카페에도 똑같이 복잡한 기준이 적용된다. 너무 시끄러워서도, 너무 누추해서도, 너무 힙해서도 안 되었다. 낡은 테이블이 즐비한, 파리에서 별스럽지도 않은 동네 어귀의 르 퓨어 카페는 그런 면에서 그녀에게는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다. 그 의도에 부응하듯, 카페에 들어간 제시는 “미국엔 왜 이런 카페가 없을까” 하며 낡았지만 쉽게 무언가를 없애지 않고 보존하는 유럽적인 가치관에 대한 부러움을 표한다. 그건 그 카페의 단골인 셀린느의 취향에 대한 찬사기도 하니, 성공적인 장소 선택으로 귀결된다.

제시에게는 그녀와 함께하는 파리의 곳곳 모두가 르 퓨어 카페와 다름없었겠지만, 확실히 카페에 들어가기 전과 후 둘의 공기는 달라진다. 나름 성공한 작가와 그사이 ‘환경투사’로 변모한 셀린느는 카페에 들어간 후 비로소 찬찬히 서로를 관찰할 여유를 얻는다. 셀린느의 눈으로 볼 때 ‘이마에 주름이 좀 늘어난’ 제시와 제시의 눈으로 볼 때 ‘살이 좀 빠진’ 셀린느. 총 13분30초간 가진 카페에서의 마주보기로 그들은 그동안 놓쳐버린 연애의 순간을 끼워맞추고 복원해나간다. 일시정지 버튼을 눌러두었던 사랑이, 플레이모드로 전환되었다는 미세하지만 아주 분명한 신호다.

화면 밖에 대기 중인, 제시를 공항으로 데려갈 운전기사 때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조급증이 일었던 <비포 선셋>을 다시 떠올리며, 나는 셀린느가 “그날 밤 내 모든 로맨티시즘을 쏟아버려서 남은 게 없다”던 잃어버린 9년이 자꾸 눈에 밟혔다. 글쎄, 만약 그들이 ‘젊은 시절의 객기로, 연락처를 교환하지 않았던’ 과거를 수정해 메일 주소라도 교환했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후회하기에 9년이라는 시간은 연인에게 만남도 가능하지만 헤어짐도 가능하며,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또 만나고 결국은 헤어지는 어리석은 짓을 하기에도 충분할 만큼 긴 시간이긴 하니, 지금의 새로운 시작이 오히려 더 희망적일 수도 있겠다 안도하는 수밖에. 어쨌든 그렇게 사랑은 페이스트리처럼 쌓인 오해와 이해의 공기층 사이에서 자칫 잘못했다간 길을 잃고 오랜 시간을 헤맬 위험이 있는 민감한 존재니 각별히 주의해서 다룹시다.

*9년 만의 재회. 셀린느와 제시가 만난 파리의 르 퓨어 카페. 9호선 샤론역 근처로, 한적한 골목에 위치하고 있다. 파리 골목 어귀 어디나 하나쯤 있을 법한 오래되고 낡은 내관. 카페와 다이닝이 결합된 곳으로, 가게 중앙에 펍이 위치하고 있어 맥주를 마시기에도 좋다. 14 Rue Jean Mace′ , 75011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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