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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 테넌바움>

■ Story 로얄 테넌바움(진 해크먼)과 애슐린 테넌바움(안젤리카 휴스턴)의 세 자녀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한 재능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채스(벤 스틸러)는 투자 전문가이며 입양된 딸인 마고(기네스 팰트로)는 극작에 솜씨를 발휘하고 막내 리치(루크 윌슨)는 테니스 천재이다. 그러나 로얄과 애슐린의 별거는 이 천재가문의 앞날에 암운을 드리우고 그들의 세 자녀 또한 재능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채 자라나 각기 집을 떠나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세월이 흘러 호텔에 기거하던 로얄은 재정이 바닥상태에 이르자 불치병을 가장하여 애슐린의 저택으로 찾아오고 이 소식을 들은 세 자녀들 또한 그를 보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다. 그러나 거짓은 들통나게 마련. 돌아온 아버지를 계기로 테넌바움가 사람들은 제각기 지니고 있던 마음의 상처를 하나둘씩 꺼내보이기 시작한다.

■ Review 90년대에 등장한 영화광 출신 감독들이 영화사 100년을 누비며 마치 샘플링하듯 영화적 기억을 이리저리 조합, 전시하는 동안 갑자기 우리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들은 마치 서로 질세라 차례로 암기를 꺼내들며 내공을 겨루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꺼내놓은 온갖 영화들의 리스트는 다시 영화 속으로 스며들어 영화를 마침내 심심풀이삼아 풀어보는 퍼즐이나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런 가운데 영화적 기억으로 가득한 낡은 무대 안에서 자신들 세대의 삶을 펼쳐보이며 사려 깊게 현실을 응시하는 이들도 있었다. 가령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에릭 로메르의 무대에서, 케빈 스미스는 우리 시대의 시트콤을 경유해 도착한 하워드 혹스의 무대에서 각각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삶을 지배하는 선택의 문제- 선택의 어려움 또는 그 불가능성- 를 놓고 열심히 토론을 벌인다. 그런가 하면 스코시즈와 알트만의 무대를 불러들인 폴 토머스 앤더슨은 이제 심각하게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때라고 이야기한다. 폴 토머스 앤더슨과 같은 또래인 <로얄 테넌바움>의 감독 웨스 앤더슨 또한 우회로를 거쳐 마침내 가족의 문제로 향한다.

웨스 앤더슨의 데뷔작 <바틀 로켓>(1996)의 주인공 앤소니는 여동생 그레이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레이스, 오빠는 어른이야. 돌아갈 집이 없는 거야.” 돌아갈 집이 없는 이들은 집 밖에서 공동체를 꾸미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대단한 몽상가들이다. 다시 <바틀 로켓>의 헨리 왈, “세상은 몽상가를 필요로 하지”. 그런데 두말할 나위 없는 천재적인 몽상가이자 앤더슨의 자전적 캐릭터인 <빌 머레이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1998)의 맥스 피셔가 성인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책이 열리면 내레이터(알렉 볼드윈)의 목소리를 따라 우리는 테넌바움가 성원들의 흥망성쇠의 과정 속으로 빠르게 인도된다. 여기엔 프랭크 카프라의 <당신은 그걸 가질 수 없어>(1939)에 등장한 괴짜 가족의 모습과 오슨 웰스의 <위대한 앰버슨가>(1942)가 들려주던 몰락과 노스탤지어의 서사가 슬쩍 겹쳐 있다. 웨스 앤더슨은 여기서 과욕을 부리기보다는 테넌바움가의 저택을 중심으로 흩어졌던 가족들을 불러모으고 아버지의 귀환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내러티브의 분산을 방지하는 비교적 안전한 선택을 한다. 게다가 존재하지 않는 원작을 상정하고 영화 전체를 10개의 장으로 나눔으로써 관객에게 적절한 이완의 마디를 제공하기까지 한다.

<빌 머레이의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주인공 맥스 피셔의 모습은 테넌바움가 삼남매의 모습- 특히 어린 시절의 모습- 위에 고스란히 분산, 투영되어 있다. 어느 순간 정신적인 성장을 멈춘 그들에게 아버지 로얄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사실 그들이 스스로의 성장을 다시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들은 자신의 뜻대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 관계가 지속되지 않고 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아내를 잃은 채스는 미친 듯이 유치한 안전훈련에 매달리고, 사랑 없이 자라난 마고는 즉흥적으로 숱한 사랑에 빠져들며, 마고에 대한 사랑을 감춘 리치는 도피한다. 성장한다는 것은 실패를 감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별안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귀환한 아버지가 개입한다. 그가 흩어졌던 가족을 다시 불러모으고 자꾸만 사건을 벌이면서도 심각한 상황 속을 철없는 놀이만으로 돌파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이지 어이없지만 진기한 경험이다.

웨스 앤더슨 영화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그가 카메라에 일관된 표정을 부여할 줄 안다는 데서 온다.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이후, 항시 호기심 어린 뚱한 표정으로 인물들을 무심한 듯 관조하는 그의 카메라는 섣불리 그들의 삶의 결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내밀한 관계 속으로 맵시있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런데 역시 표정이 사라진 배우들의 몸짓 속에서 감정을 이끌어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카메라의 존재이다.

아마 <로얄 테넌바움>에서 진정으로 심금을 울리는 순간은 거실에 놓인 노란 텐트 안에서 마고와 리치가 서로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일 것이다. 여기엔 일찍이 파괴되었던 자신들의 유년을 다시 더듬어 기어이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안타까운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에 무심한 표정을 부여하는 또 한명의 미국 감독 토드 솔론즈가 <해피니스>(1998)를 통해 그토록 신랄하게 공격했던 저주의 대상인 가족을, 웨스 앤더슨은 냉소나 조롱이 깃들지 않은 눈길로 다시 한번 응시한다. 그는 매우 사려 깊고 신중하게 자신의 신세기를 열어보인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의 영화 속에 담긴, 거의 불가해할 만큼 풍성한 유머 앞에서 비평이란 노상 시시한 것으로만 남아 있게 될 뿐이란 것을 고백해야 한다.

<로얄 테넌바움>의 캐스팅

위대한 테넌바움가의 식구들

웨스 앤더슨의 <로얄 테넌바움>은 일단 그 화려한 캐스팅으로 주목을 끈다. 그가 배우들을 운용하는 방식은 그 자체만으로도 긴 얘깃거리가 될 법도 하다.

테넌바움가의 가장(?) 로얄 역을 맡은 진 해크먼과 양녀 마고 역의 기네스 팰트로의 모습은 그들이 이전에 지니고 있던 다분히 고정적인 이미지에서 가장 먼 거리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철없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로얄의 캐릭터는 진 해크먼이 이전에 맡았던 배역들이 환기시키는 법, 질서, 냉혹함 등의 의미와 겹쳐지면서 매우 풍자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짙은 눈화장 덕에 거의 무성영화 시절의 여배우를 연상시키기까지 하는 기네스 팰트로는 앤더슨 자신의 이전작들에 등장한 이상적인 여성 캐릭터들에 대한 과감한 뒤틀기라 할 만하다.

감독의 단짝이자 시나리오 공동 집필자이기도 한 오언 윌슨은 항상 테넌바움가의 일원이 되고 싶어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다는 데서 좌절감을 맛보는 소설가 엘리 역으로 출연한다. 이 인물은 역시 오언 윌슨이 연기했던 <바틀 로켓>의 디그넌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이다. <바틀 로켓>에는 디그넌이 자신의 가족을 부끄러워하며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대안가족 혹은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매우 암시적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루크 윌슨은 앤더슨의 영화에 사춘기적인 섬세함과 혼란스러움, 열정을 끌고 들어와 로맨스를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그가 연기한 막내아들 리치는 테넌바움가의 세 남매들 가운데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주인공 맥스 피셔와 가장 많이 닮아 있다. 심지어 웨스 앤더슨은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의 빌 머레이를 다시 한번 등장시키면서까지 전작의 삼각관계를 변주한다. 채스 역의 벤 스틸러는 시종일관 빨간 아디다스 운동복을 입고 등장하는데 그가 똑같은 운동복을 맞춰 입은 두 아이들과 함께 대피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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