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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담씨의 얼굴이 내 영감 속의 얼굴이었다
김성훈 사진 백종헌 2016-04-14

<스틸 플라워> 박석영 감독, 배우 정하담

박석영 감독과 배우 정하담(왼쪽부터).

<스틸 플라워>의 주인공 하담(정하담)은 영화 제목대로 삭막한 거리의 ‘강철 같은 꽃’(Steel flower)이다. 어떤 사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간다. 일을 구하고, 만만치 않아 보이는 무게의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살 집을 찾아나선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에게 따뜻한 손을 쉽사리 내주지 않는다. 그런 하담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라면 탭댄스를 추는 것이다. 전작 <들꽃>에 이어 두 번째로 함께 작업한 박석영 감독과 배우 정하담이 치열하게 고민해 빚어낸 덕분에 영화 속 하담은 당당하게 세상과 맞선다. 박석영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날것의 감정’이라고 얘기하던데 영화 속 하담의 행동과 감정은 매우 논리적”이라며 “그건 정하담이라는 배우가 하담의 감정을 정확하게 알고 연기를 한 덕분이고, 카메라가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화를 보면 박석영 감독이 무슨 뜻으로 한 얘기인지 알게 될 것이다.

-전작 <들꽃>이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을 때 마음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고.

=박석영_<들꽃>은 첫 영화였고,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과 함께 작업한 작품이었으며, 실제 가출 청소년들을 오랫동안 취재해 재구성한 이야기였다. 그간 가출 청소년들을 다룬 영화들이 몇 있었는데, 그 작품들이 청소년들을 다루는 시선과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들꽃>을 만들 때 많은 고민을 하며 찍으려고 노력한 것도 그래서다. 운 좋게도 영화제에 초청받아 “새로운 형태의 영화예술을 발견했다” 같은 격려를 받을 수 있어서 신인감독으로선 감사했다. 그러나 영화제 후반부로 갈수록 마음이 불편해졌다. 누군가로부터 상을 받기 위해 찍은 게 아니라 가출 청소년 친구들을 위해 만든 영화인데, 내가 그걸 이용한 건 아닌가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정하담_영화제 마지막, 관객과의 행사가 끝난 뒤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있었다. 그전까지는 연기가 놀이에 가까운 직업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이후부터 연기는 정교해야 하고, 가슴속 아픔까지 도려내야 하며, 때로는 상처를 받으면서 하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때 감독님에게 전화가 왔고, 그런 생각들을 털어놓으며 행복하지 않다고 얘기했더니 감독님께서 만나자고 하더라. 카페에서 감독님께서 전날 술을 마시면서 떠올린 이야기가 있는데 그걸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하셨다. 중심 얘기는 어떤 일 때문에 쫓겨나 굶고 있던 여자아이가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눈물을 닦고 카메라 밖을 나갈 때 멀리서 여자아이의 탭댄스 소리가 들리는 이미지라는 거였다.

-당시 하담씨의 어떤 면모 때문에 함께하자고 한 건가.

=박석영_그 엔딩 장면을 생각했을 때 하담씨 말고 다른 배우를 떠올려본 적이 없다. 하담씨의 얼굴이 내 영감 속의 얼굴이었고, 그 얼굴이 카메라 밖에 나갈 때 느껴지는 여자아이의 얼굴이었기 때문에 하담씨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들꽃> 오디션 때 영화 속 하담의 전사를 요구한 것처럼 이번에도 인물의 전사를 따로 주문하진 않았나.

=정하담_‘<들꽃> 속 하담의 5년 후’라고 설명한 것 말고는 따로 주문한 건 없었다. 물론 5년이라는 시간 경과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고도 하셨다. 하담은 많은 일을 겪으며 강해졌고, 인생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 점에서 <들꽃> 속 하담과 <스틸 플라워> 속 하담은 다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하담이 캐리어를 끌고 집을 찾아다니는 오프닝 시퀀스가 인상적이었다.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쥔 손, 투박한 걸음걸이, 고단해 보이는 뒷모습 등 움직임이 그녀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박석영_원래 그 시퀀스로 시작할 계획이 없었다. 시나리오에는 한 여자가 춤을 추다가 욕을 하면서 하담에게 다가가 뺨을 때리는 장면이었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라고 생각했고, 그걸 찍고 싶었다. 그런데 촬영 초반에 가장 중요했던 건 하담이라는 여자아이가 어떤 몸과 움직임을 가지고 있는가였다. 하담이 캐리어를 끌고 다녔던 장면을 찍은 것도 그 아이를 만나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캐릭터를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 하담은 일주일 동안 걸어야 했고, 산동네의 폐가에 다다른 그녀의 뒷모습과 발걸음을 통해 불안해하고, 떨고 있는 정서를 마주할 수 있었다.

-무작정 걸었을 때 어땠나.

=정하담_촬영 첫 일주일 동안 모니터에 찍힌 내 모습은 하담의 느낌이 안 들었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추운 날 걸어다녔으니 동상에 걸린 느낌이 있었는데 그걸 의식한 걸음걸이도 해봤지만 걸음걸이만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또 하담이 끌고 다니는 캐리어가 하담의 집이라고 생각했다. 걸음걸이, 캐리어를 꽉 잡은 손 같은 세세한 설정들이 체화되고 나니 그다음 장면들을 자연스럽게 촬영할 수 있었다.

박석영_오프닝 시퀀스는 하담이라는 캐릭터를 찾아가는 과정, 그 자체였다. 캐릭터를 찾기만 하면 그 뒤 장면들은 뭐든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영화 속 하담은 <들꽃>의 하담보다 훨씬 더 당당하고 씩씩하며 용기 있는 여자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 점을 염두에 두었나.

=박석영_시나리오를 쓸 때 하담의 내면을 쓸 생각은 없었다. 그저 하담이 무엇을 맞닥뜨리게 될 것인가. 현장에 가서 배우와 함께 대화를 하면서 설정들을 세심하게 바꿔야 했다.

정하담_대본에 인물의 생각과 행동이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는 장면이 있는가 하면 현장에서 연기하면서 느낀 감정에 따라 바꾼 장면도 있다. 영화 후반부, 하담이 탭댄스 학원에 가서 6만원을 두고 탭슈즈를 들고 나오는 장면이 있다. 돈을 두었다고 해도 그건 도둑질과 다를 바 없었다. 6만원이면 신발 가게에 가서 신발을 살 수 있는데 하담이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물건을 제대로 사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걸 생각하니 마음이 정말 아팠다.

-<스틸 플라워>를 찍고 난 뒤 <검은 사제들> <아가씨> <밀정>을 차례로 작업했다.

=정하담_<들꽃>과 <스틸 플라워>가 개봉하기 전에 오디션을 보고 출연한 작품들이다. <아가씨>에서 맡은 역할은 하녀인데 정말 작은 역할이라 찾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웃음) 그럼에도 박찬욱 감독님의 현장을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 김지운 감독님의 <밀정>에서는 역할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얘기하기가 어렵다. 역시 작은 역할이지만 좋은 경험이었다. 박석영 감독님의 차기작 <재꽃>에도 출연하기로 했다.

-<재꽃>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박석영_6월에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다. 현재 시나리오 수정과 아역배우 캐스팅을 진행하고 있다. <스틸 플라워>의 하담이 시골에 정착해 어떤 가족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열살짜리 아이가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캐리어를 끌고 한 마을에 들어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로, 가족 드라마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해하게 되는 작품이 될 것이다. <재꽃>이 끝나면 아프리카로 떠나 종군 사진작가를 소재로 한 영화를 찍을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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