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결의 비겁함이 궁금하다면 영화 후반작업 모니터링을 경험해보라 권하고 싶다. 투자사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이 모니터링은 다수의 일반인들로 이루어지는데 그들에게서 5점 만점에 가까운 평가를 들을수록 영화는 온전한 모습으로 개봉할 수 있다. 문제는 낮은 점수가 나왔을 땐데 그때 내려지는 처방은 최악의 경우 재편집이다(극단적 최악은 개봉 보류가 있을 수 있겠다). 대중의 선택을 받아야 하는 대중예술이기에 그들의 입맛에 맞춘다는 게 관계자들의 명분인데 그렇게 재편집을 거친 영화가 과연 궁극적으로 좋은 영화인가? 라고 따져본다면 그 누구도 제대로 답할 수 없을 것이다(‘좋다’라는 것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흥행을 기준으로 성공하는가, 라고 물어봐도 그것 또한 답할 수 없다).
이렇게 그 과정에선 가장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게 무책임할 수 없는 게 다수결의 함정이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 옳은 것은 다르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은 가능하다. 때문에 현장에서 가장 믿음직한 감독은 유능한 독재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 여야에서 터져나오는 공천 잡음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정치란 윤리적이고 균형 잡힌 이상적 독재자에 맡기는 게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어차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 대중, 바로 그들 자신이니 다수의 민의를 반영하는 게 가장 현명한 의사결정 방식이라는 것엔 동의하지만 그 방식으로 원하는 사회로 발전해가는 게 가능한가. 실제로 우리에겐 후보의 공약에 속아 그들을 뽑고 후회했던 수많은 나날이 있지 않은가. 마치 최후의 보루인 것처럼 여론조사로 경선을 실시하지만 그 점이 오히려 아무도 패러다임을 제시하지 않고 우리의 선택으로 실패마저 군말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폭력성이 내재돼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 알고 있다. 윤리적이고 균형 잡혔으면서 이상적인 독재자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유니콘 같은 인물이 있으면 애초에 정치인 인기차트는 생겨나지도 않았겠지. 빈곤과 인권, 그리고 환경 문제까지 총망라해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적절한 수. 마치 알파고 같은 수를 두며 현안을 해결해나가는 자가 있다면 각종 이데올로기로 범벅된 정치실험의 역사는 있지도 않았을 거다. 때문에 또한 그런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알파고에 수많은 기보를 입력시켰던 것처럼 인간 역사를 입력시키고, 이세돌과 대결해서 최상의 수를 찾게 한 것처럼 알파고에 사회문제를 해결할 최상의 수를 찾게 한다면 어떨까. 그 수를 현실화시키는 데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하더라도 방향성에 대한 불확신은 잠재울 수 있지 않을까. 현재 발전 속도로 보아 머지않은 근미래에, 그런 실무 정책들을 인공지능이 대신한다면 우리 정치는 좀더 높은 가치에 대해 얘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부재중인 정치인들의 철학은 그때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플라톤이 꿈꿨던 철인정치가 실현된다고도 볼 수 있는데… 오, 이데아가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