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소연의 <옆집의 영희 씨>는 ‘창비청소년문학’ 일흔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것은 청소년‘도’읽을 수 있다는 뜻일 뿐, 청소년‘용’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옆집의 영희 씨>에서는 SF 판타지 단편들을 만날 수 있다. 정소연은 익숙함에서 출발해 아주 먼 곳까지, 능숙하게 항해할 줄 안다.
표제작 <옆집의 영희 씨>는 좋은 집을 싸게 임대하려는 집주인의 감언이설로 시작한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 천사 같은 집주인이라니, 오오, 이래서 SF인가? 아니다. 그 집에는 현실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옆집에 그런 게 있어서 그렇지….” 옆집에 외계인이 있다. 그를 감시하는 양복 입은 남자들도 있다. 그런데 갈색 두꺼비 같은 그와 마주친 날, 당황해서 차라도 마시고 오라고 인사치레로 말을 건넨 바람에 정말 그가 수정의 집으로 들어온다. 2주에 한번꼴로 이웃과의 티타임을 갖게 된 수정은 그에게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그의 이름은 이영희. 그의 별에서 쓰는 본명을 묻자, 지구에서는 말할 수 없다는 답을 듣는다. 대기 성분이 다르고, 기압이 달라서다. 비슷하게라도 들려달라고 하자, 영희씨는 기묘한 공기의 파동을 일으킨다. 음성이 아니라 정말, 파동이다. 헤어드라이어의 바람을 맞을 때처럼 눈자위가 뜨거워지는 기분. 그러다 영희씨는 떠나게 되고, 그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있는 가운데, 수정만이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어떤 메시지를 파동으로 전한다. “영희씨와 수정의 사이로 아득한 우주 저편의 불꽃과 남극에서 너울지는 오로라와 겨울에 피어오른 자줏빛 연꽃 같은 열기가 조각난 별빛 같은 빛의 가루를 남기고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건 어떤 뜻이었을까. 그의 별의 언어로 수정의 이름을 말한 것은 아닐까. 혹은 보고 싶을 거라든가, 그동안 고마웠다는 뜻은 아니었을까.
만남과 이별과 이별 이후의 만남에 대하여, 정소연은 근사한 소설을 쓴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대국을 떠올리며 읽으면 안성맞춤일 <우주류>(이 단어는 바둑 용어인 동시에 주인공이 우주로 떠나는 이야기를 뜻한다)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마산앞바다>는 아련한 멜로드라마다. “사람이 죽으면 바다로 간다는 것은 새로울 것 없는 사실이다.” 소설 속 세계는, 망자를 만나기 위해 그들이 머무는 림보인 마산앞바다에 가면 되는 설정이다. 주인공은 마산에서 자랐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첫 죽음은 첫사랑보다 먼저 다가온다.” 당신이라면 누구를 만나기 위해 마산앞바다로 가겠는가. 주인공은 누구를 떠나보내기 위해 그곳으로 향할까. 혹은 누구를 만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먼저 떠나보내야 하는가. 소설의 마지막 순간에 영화 <캐롤>의 마지막 장면이 겹친다. 누군가를 ‘알아본다’는 일이 서글픔에서 행복으로 바뀌는 순간의 멋짐에 취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