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유행했던 컴퓨터 바둑 게임. 번번이 패했다. 아무리 초보라고 해도 게임창을 꺼버리면 그만인 한낱 저용량 프로그램한테 매번 농락당하니, 무척 얄미웠다. 그 탓인지 이세돌 9단이 알파고한테 패한 게 그리 놀랍지 않다. 물론 이세돌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실력차는 천지 차이겠지만, 그사이 컴퓨터도 비약적으로 진화했을 테니까. 어차피 기계의 연산 능력이 사람을 초월한 지 오래되지 않았나. 알파고가 화제여서 그렇지, 이미 일본에서 매년 인공지능과의 바둑대회가 진행되어왔고, 조치훈 9단을 비롯한 뛰어난 기사들이 패했었다.
그저 인류 최후의 인간과 인공지능간의 대결이라는 SF 스펙터클이 구글에 의해 연출됐을 뿐, 이미 기계는 인간의 연산 능력을 압도하고 있다. 어제 뉴스에는 급기야 소설을 쓰는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아마도 이번에 우리가 느낀 두려움은 인간의 지적 능력을 신의 위치에 놓고, 자연과 사물의 질서를 관장하는 최후의 심판관이라고 여기는 근대적 세계관에 균열이 갔기 때문이리라. 지능마저 기계가 앞선다는 두려움 때문에 느닷없이 눈물, 우애, 동정심, 존재론의 철학 등 다른 우월한 ‘인간성’을 찾아 광야를 떠도는 눈물 겨운 소프 오페라를 지켜보는 건 꽤 초라한 일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런 두려움은 기계의 세계를 자기 진화를 겪는 순수한 시공간으로 착시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기계는 중립적으로 진화되지 않는다. 계급, 권력, 젠더와 같은 “사회적 관계” 안에서 진화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기술의 대상, 표현, 그 미래까지 인간들에 의해 결정지어진다는 뜻이다. 인간에 대한 기계의 지배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지배의 표상일 뿐이다.
간단히, 지하철역 카드충전기를 보라. 비용 절감과 이윤을 위해 전국 지하철 매표창구의 노동자들이 해고되어야 했다. 자본주의하의 기계 발전은 노동자들을 이렇게 지속적으로 일자리에서 추방해왔고, 정보통신기술이 고도로 집적되면서 지능 기계들이 이제 지적 노동자들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전세계적으로 치닫고 있는 청년실업률은 노동의 기계화가 그려낸 우울한 음각화다. 제레미 리프킨을 비롯한 많은 석학들은 로봇 기술과 자동화를 주도하고 있는 상위 10%와 저임금 노동시장과 실업예비군으로 주저앉는 나머지 하위 90%로 분리되는 양극화의 방향으로 기계 발전이 수렴되고 있다고 경고해왔다. 그리고 기계가 이렇게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노동시장을 교란하는 경향을 교정하기 위해 등장한 게 바로 “기본소득”이다. 유럽을 넘어, 캐나다와 미국까지 기본소득 열풍이 불고 있다.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는 신기원의 무대에서 최소한의 인간적 존엄, 그리고 지적 능력을 확장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한 ‘거대한 실험’이자, 불가항력의 안간힘인 셈이다.
알파고와의 대국에서 정체도 아리송한 ‘인간 승리’와 국뽕에 취할 시간이 있다면, 차라리 이런 시대적 전환에 탑승해 노동시간 단축과 기본소득을 성찰하고 사회적 동물로서의 기민함을 되찾는 게 더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그게 한국 알파고를 만들자며 기계적으로 되뇌는 저 청와대 정치인들과 다른 인간적인 행보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