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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라이프, 액추얼리
김혜리 2016-03-24

※<아노말리사>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라스트 홈>

<라스트 홈>은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월 스트리트의 시점으로 브리핑한 <빅 쇼트>의 리버스 숏이다. 은행 말만 믿고 담보대출을 유지해온 성실한 건설노동자 데니스(앤드루 가필드)는 갑작스런 퇴거 명령을 받는다. 3대가 살아온 집에서 그는 불법침입자로 불린다. 그러나 부동산 업자(마이클 섀넌)에게 데니스의 ‘스위트 홈’은 비워야 할 또 하나의 박스일 따름이다. 하루만 말미를 달라 청하는 데니스와 어머니에게 2분이 주어진다. 데니스 모자는 침실까지 들어온 경찰의 재촉을 받으며 두서없이 필수품을 챙긴다. 이 와중에도 아버지와 할머니는 막 하교한 소년을, 평정한 얼굴로 안심시키려고 애쓴다. 비탄과 굴욕, 분노가 뒤엉킨 이 아수라장에서, 슬픔은 한참 더 제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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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노말리사>의 찰리 카우프먼과 듀크 존슨 공동감독은 <인사이드 아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 <시네도키, 뉴욕> 등등 혹시 카프카의 환생인가 싶은 작가/감독 찰리 카우프먼의 전작만 봐도 능히 수긍이 간다. 그러나 신작 <아노말리사>를 보고 나니 더욱 분명해진다. <인사이드 아웃>이 상상한 깔끔히 구획된 ‘민주적인’ 행동 결정 및 인격 형성 프로세스는, 카우프먼에게 터무니없이 나이브한 동화일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평평하고 모형으로 단순화할 수 있는 반면, 자아는 광활하고 복잡하다. <아노말리사>의 퍼펫애니메이션 양식은 카우프먼의 세계관과 과하다 싶을 만큼 딱 들어맞는다. 영화 속 모든 현상이 즉각 은유가 되는 형국이다. 중년의 주인공 마이클 스톤(데이비드 튤리스)의 눈에 타인은 모두 똑같이 생겼고 똑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인간을 동일인물로 인식하는 이른바 프레골리 망상이다. (극중 배경인 호텔의 이름은 프런트 직원의 발음에 따르면 프레졸리인데 마이클은 체크인을 하며 ‘프레골리’라고 되뇐다.) 역설적이게도 고객 서비스 전문가이자 스타 강사인 마이클은 한때 살았던 도시 신시내티로 출장 온 밤 십수년 전 자신이 무책임하게 떠났던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내게도 특별한 누군가가 있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인데 이 재회는 마이클의 섣부른 유혹으로 민망하게 끝난다. 낙담해서 객실로 돌아온 마이클의 귀에 불현듯 ‘타인들’과 구별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영화의 나머지는 마이클과 리사(제니퍼 제이슨 리)의 짧은 조우를 따라간다.

<아노말리사>는 제목이 약속하는 대로, 어디서도 경험한 적 없는 영화 체험을 제공한다. 3D 프린팅 기술로 출력된 캐릭터의 표면은 적당한 온기를 전하고, 완벽하게 매끄럽지 않은 인형의 움직임은 영화가 보여주려 인간 행동의 미세한 인위성을 훌륭히 반영한다. 애니메이터 듀크 존슨 감독은 보통의 퍼펫애니메이션이 마감재나 CG로 지워버리는 신체 부위 봉합선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유사 인간이 관객에게 주곤 하는 징그러움(uncanny valley)을 슬기롭게 피해간다. 요컨대 <아노말리사>는 적당히 인간적이고 적당히 기계적이다. 찰리 카우프먼의 단골 배우인 톰 누난이 두 주인공 외 모든 인물의 목소리를 더빙한 표현법 역시 실사영화였다면 실천하기 어려웠을 터다. 관객이 기타 캐릭터의 목소리가 똑같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지점은 마이클과 아내의 통화 장면이다. 여기서 대사는 ‘생리통’을 언급함으로써 마이클의 배우자가 생물학적 여성이며 그럼에도 남성의 음성으로 말하고 있음을 확인시킨다. 한편 <아노말리사>가 구현한 호텔 공간은 어떤 실사영화 속 그것보다 우리가 갖고 있는 호텔의 인상에 부합한다. 미지근한 공기와 최면을 거는 복도, 중간색의 가구들, 작동법이 묘연한 수도꼭지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전화기의 단축버튼까지. 자못 청결한 호러의 기운마저 감돈다. 이 모두를 덮은 은은한 조명과 톤 다운된 색조는 화면 전체에 부드러운 안개를 씌워 마이클이 바라보는 단조로운 세계상에 공감하도록 유도한다. <아노말리사>의 공간은 정교한 ‘인형의 집’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모습인데 이 분야의 대가인 웨스 앤더슨 감독도 시샘할 법하다. <아노말리사>는 인물의 전면 누드를 노출하며 적나라한 섹스를 포함한다. 이 영화의 성 묘사는 애니메이션으로서 드문 신이라는 희소가치보다 스크린 속 섹스가 어느 정도 기대기 마련인 환상성을 불식했다는 데에 비상한 면이 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두 인간이 키스에서 정사로 머뭇머뭇 나아가는 과정의 현실적 어색함과 우스꽝스러움을 <아노말리사>는 흔한 편집의 생략과 음악의 덧칠 없이 통째로 표현한다. 연기자가 무의식적으로 자기를 보호하지 않는 인형이라는 점도 이 역설적인 리얼함에 작용했을 것이다. 속셈이 뻔한 유혹, 옷을 벗기는 동작의 서툶, 서로의 몸을 몰라 발생하는 애무의 버퍼링, 섹스가 끝난 다음의 어쩔 줄 모름까지. 콩깍지 따위 없는 풀숏으로 침대를 줄곧 지켜보는 관객은 인형의 섹스에 감정을 이입할지 관찰할지 관람의 자리를 결정하지 못한 채 서성이는 특이한 경험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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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존적 불안의 독창적인 표현에 대한 감탄을 가라앉히고 나면 <아노말리사>는 진심으로 좋아할 수 없는 좋은 영화였다. 내 냉담의 원인은 주로 마이클이 인간관계를 대하는 극히 이기적인 태도에 있다. 뒤집어보면 나 이외 모든 인간이 동일한 외모와 음성을 가졌다는 인식만큼 스스로를 스페셜한 존재로 정당화하는 설정도 없다. 마이클은 애초에 인간들 사이의 풍요로운 차이를 보려 하지 않고 여성을 향한 관심도 자기의 욕망을 얼마나 충족시킬 수 있는가에 한정돼 있다. 그는 자성을 모르고 세상이 자기에게 동조하지 않음을 견디지 못한다. 이 욕구를 ‘사랑’이라는 절대 단어로 일축해 이해하는 것은 주인공 특전이라고 해도 너무 너그러운 반응으로 여겨진다. 극중 꿈 장면이 보여주듯 세상은 오로지 마이클과 특별한 한 여자를 떼어 놓으려는 훼방꾼이다. 수많은 타인이 마이클을 소외시키는 힘있는 존재가 아니라 마이클에게 사랑해달라고 매달리는 약자의 처지로 그려졌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게다가 그는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파악해서 접근하라”는 본인의 상태와 모순된 영업지침서를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정도로 객관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항구적 욕구불만이다.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않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마이클은 확실히 찰리 카우프먼의 남자주인공이다. 마이클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존재는 언제나, 현재 삶을 함께하는 반려자가 아니라 마지막으로 그가 도망쳤던 연애 상대다. 나를 더 움찔하게 만들었던 것은, 외모를 비롯해 모든 면에 자신감 없는 소녀 같은 모습을 보이던 리사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했다가 이튿날 그녀가 아침밥을 씹어 넘기고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순간 급격하게 식어버리는 마이클의 반응이었다. 이것이 아마도 그가 스스로를 가둔 패턴일 것이다. 공부가 부족해 사전을 찾아가며 남자의 책을 읽었다는 리사에게 마이클이 감동하는 대목 역시, 일견 매우 로맨틱하지만 달리보면 우월한 입장에 설 때만 애정을 실감하는 사람의 징후이기도 하다. 영화 결말에 마이클이 아들에게 선물한 섹스 숍 인형은 리사처럼 얼굴에 흉터가 있다. 혹시 리사는 마이클의 환상이 인형에 빙의시킨 가상인물은 아닐까? 이런 억측까지 다다른 것은 마이클이 말하는 바와 달리 자폐의 상황에 안주하고 있다는 인상 탓이었다. 그러고 보니 적어도 카우프먼은 인물을 변호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어쩌면 <아노말리사>는 주인공을 ‘악역’으로 바라볼 때 가장 만족스럽게 볼 수 있는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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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트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는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보편적 고통으로 연결된 뉴요커들에 관한 ‘에세이’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등장인물을 엮는 사슬이 완성되는 구조는 <바벨> 등 많은 야심만만한 영화가 활용한 장치지만 <월터 교수의 마지막 강의>는 거대한 섭리를 욕심내지 않고 일상에 집중한다. 그중에서도 팀 블레이크 넬슨 감독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그려 눈길을 끈다. 직장을 그만두고 교외로 이사한 사라(그레첸 몰)는 남편의 외도와 무감동한 생활에 숨막혀 알코올에 의지한다. 등굣길 차 안에서 총명한 맏딸이 정면으로 문제를 지적하자 사라는 둘째딸부터 내리게 한다. 그러나 진실을 부인하고 화를 내는 대신 딸에게 객관적 판단을 묻는다. “엄마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것 같니?” “그냥 엄마가 행복하지 않아 보여. 안 마시면 안 돼?” “그렇게 쉽지 않아.” “술 끊는 약은 없어?” 이런 대화에 꽤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모녀는 서로에게 남겼을지도 모를 상처에 대한 사과로 대화를 마무리 짓고 각자의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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