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에 성장기를 보낸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곧 21세기가 온다는 것이었다. 대한민국은 강대국이 되고 누구나 충분히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말. 성차별이 사라질 거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첨단기술에 대한 낙관론도 있었다. ‘21’은 마법과도 같은 숫자였다. 그때가 오면 모든 문제가 일시에 사라지기라도 하는 양 당시의 어른들은 새로운 시대가 올 거라고 말했다. 나는 대충 흘려들으면서도 때가 되면 그 말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다. 마법처럼.
그리고 21세기가 되었다. 수없이 많은 일들이 있었다. 긍정적인 일들은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 날짜 탓인지 5년 전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떠오른다. 시간이 흘렀음에도 이 일은 우리에게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생선이 테이블에 올라올 때마다 어떤 사람들은 잊지 않고 방사능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다. 한창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진행 중일 때, 나는 이 글을 어떤 내용으로 채울 수 있을지 궁금했다. 섣불리 낙관할 수는 없었지만 단상 앞에서 유의미한 말들을 쉼 없이 쏟아내는, 그래서 불가능한 곡예를 펼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승리하기를 바랐다. 지켜보던 많은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필리버스터는 중단되었다. 그때 주변 사람들이 보인 허탈하고 망연한 표정은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내 눈에는 단상에 선 의원들이 죽음을 지연시키고자 한없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셰에라자드와 겹쳐 보였다. 그런데 난데없는 결말이 나타나 이야기가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서사를 구성하는 동물이다. 그러니 필리버스터라는 대서사가 이렇듯 허무하게 끝나버렸을 때의 배신감도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중단시킨 사람들 중 한명이 특정 종교를 지지하며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는 걸 알았을 때의 충격도 쉽게 가시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21세기라고 한다.
21세기의 우리에게는 테러방지법을 빙자한 국민감시법이 있다. 21세기의 우리는 동성애에 반대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 일단 두 가지만 언급했는데도 믿을 수가 없다. 이쯤 되면 차라리 오염된 바다를 생각하는 쪽이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어쩌면 31세기에는 정말로 밝은 미래가 올 거라고 생각하는 쪽이 나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