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중반, 신촌 로터리 중앙에는 시계탑이 있었고 지금보다는 버스 정류장이 많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꼭 한두개의 신문 가판대가 있었는데 새마을운동 깃발의 색깔과 똑같은 초록색의 가판대에는 신문뿐만이 아니라 울긋불긋한 색깔의 만화책과 각종 성인 주간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고우영의 성인극화 <수호지>가 인기를 끌자, 가판대 위에는 성인극화란 딱지를 단 얇은 만화책들이 앞다투어 진열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오학년 때의 어느 날, 나의 눈길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선데이서울>의 표지였다. 미스 롯데 서미경이 등이 훤히 드러난 붉은 드레스를 입고 고개를 돌린 뒷모습의 표지였다. 사고 싶었지만 어른들이 보는 책이란 생각에 감히 <선데이서울>을 살 수 없었고, 그나마 만화책은 어른들이 보는 것이라도 덜 죄스러워 옆에 있던 성인극화 <여간첩 마타하리>를 사서 보았다. 만홧가게에서 어린이 만화를 보던 내가 성인극화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 만홧가게에서 보았던 만화책들이 어린이들이 보는 것이었다면 극화란 이름이 붙은 고우영의 <수호지>나 향수의 <주먹천하 유지광> <여간첩 마타하리> 같은 만화책들은 어른들이 보는 만화였다. 그때는 어른들이 보는 만화가 극화인가보다 했고, 극화는 만화의 그림보다는 좀더 사실에 가깝게 그림을 그린 그런 만화를 말하나보다 했었다. 극화란 말은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다. 1950년대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에 대항하는 새로운 만화를 그린 자들이 자신들의 만화를 극화라 칭하고, 개인의 욕망과 잔혹함을 좀더 자극적이게 표현한 만화를 그렸다.
<만화의 시간>을 쓴 이시카와 준은 “데즈카 오사무가 세운 것이 만화의 ‘정신’이라면 극화가들이 세운 것은 ‘육체’였다”라 말하는데 극화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한국의 성인극화에는 만홧가게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넘쳐났다. 성욕과 야망, 깡패, 배신, 폭력 같은 것들이 넘쳐났다. 물론 정신은 매우 빈곤하고 공허해서 김민이나 박기정의 만화를 보고 느끼는 감동 같은 것은 없었고, 아랫도리가 시큰해지는 육체의 반응이 일어나거나 어린 소년이 보기에도 민망하고 유치한 내용들이 많아, 보고 나면 부끄러워졌다.
성욕, 야망, 깡패, 배신, 폭력…
1974년 여름, 소년잡지 <어깨동무> 별책부록으로 대단한 만화가 연재되기 시작했고, 나는 이 만화가 소년잡지에 처음으로 등장한 극화라고 생각했다. 백영철 그림, 어깨동무 만화기획실 구성. <봉화산의 팔도검객>. 아름다운 여자가 등장한다. 이 여자는 자객이다. 그녀는 가지고 다니는 두 자루의 단검 중 하나를 공중에 날리고 다른 한 자루의 단검으로 상대방을 공격한다. 상대가 그녀의 손에 쥔 단검을 막는 순간, 공중으로 날렸던 단검이 상대의 정수리에 꽂힌다. 만약 상대가 공중의 단검을 간파하고 그것을 피하려 하면 여자의 손에 쥔 단검이 그의 급소를 파고든다. 대단한 여검객이다. 그녀는 여행 중인 여염집 처녀로 변복하고 서너살 남짓한 어린아이인 조카와 함께 조선 팔도를 유랑하는 주인공 검객에게 접근한다. 여자와 어린 조카는 친해지고 여자는 험한 길 위의 인생을 사는 어린이에게 동정심을 느낀다. 마침내 대결의 순간. 주인공 검객은 자신의 어린 조카를 목말을 태우고 칼을 뽑아든다. 여자는 당황한다. 자신의 장기인 단검을 공중으로 날려보내고 공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녀는 상상한다. 자신이 칼을 날려보내면 그 단검이 어린아이의 정수리에 꽂혀 죽는 것을. 결국 그녀는 자신의 특기를 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검객의 칼에 쓰러지고 만다. 여자가 주인공을 보며 내가 어떤 특기를 가진 검객인 줄 알았냐고 묻자, 남자는 그것을 간파했기에 어린 조카를 목말 태워 자신의 머리를 보호했다고 한다. 여성의 모성애를 이용하여 상대방을 해치운 것이다. 나는 이 장면을 보고 경악했다. 어린 조카를 데리고 길을 가는 검객에게 약초를 캐는 사내가 길동무를 자청한다. 약초를 캐는 사나이는 검객과 같이 다니는 나이 어린 조카를 진심으로 동정한다. 그는 검객에게 어린아이가 무수한 살생을 보는 것이 과연 아이에게 좋은 일인지를 묻고, 아이는 아이답게 자라야지 이 아이가 크면 도대체 뭐가 되겠느냐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아이를 위해 정착을 하든지 아니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는 가정에 맡기라고 충고한다. 검객이 그의 말을 귓등으로 듣자 그는 산길을 걷다 만날 수 있는 야생의 풀들을 가리키며 아이가 아플 때 비상약이 될 수 있는 약초를 알려준다. 참 좋은 마음씨의 사람이다. 일행이 쉬기로 하고 자리에 앉자 약초 캐는 사내는 검객에게 자신이 가져온 차를 권한다. 대나무통에 든 차를 자신이 한잔 마시고 검객에게도 따라준다. 차를 마신 검객이 괴로워하며 쓰러지자 약초 캐는 사나이의 본색이 드러난다. 그는 검객을 죽이기 위해 그에게 접근한 자객이다. 쓰러졌던 검객이 입안에 머금었던 독물을 내뱉고 칼을 뽑아 자객을 죽인다. 그러자 죽어가는 자객은 자신이 아까 아이를 걱정했던 말은 진심이었다며 검객이 입안에 머금은 독물은 매우 강해서 서둘러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위험하다며 자신이 검객에게 약초를 설명할 때 뽑았던 약초를 먹으라며 죽는다. 죽어가는 사내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검객과 아이의 얼굴. <봉화산의 팔도검객>과 같은 만화를 이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본 영화 <매카닉>과 <빗속의 방문객>에서 보았던 찰스 브론슨만이 이 만화의 주인공과 비슷한 정도의 냉혹함을 견줄 수 있었다. 주인공을 죽이려는 자객들이 오히려 인간적이고, 주인공은 어린아이를 이용하여 그들의 인간적인 약점을 파고들어 그들을 죽인다. 천하의 냉혈한 찰스 브론슨도 아이를 이용해 적을 죽이지는 않는다. 어린 내가 보기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검객은 한마디로 이해할 수 없었고 혐오감까지 드는 무시무시한 캐릭터였다. 비슷한 시기에 본 사이토 다카오의 <고르고 13>의 주인공도 <봉화산의 팔도검객> 주인공과 비슷한, 무지막지한 캐릭터였지만 적수가 아니었다.
그리고 몇년 후, 고등학생이 되어 명동 달라 골목의 외국 서적을 파는 책방에서 눈길을 끄는 만화책을 발견했다. <아이 딸린 늑대>(子連れ狼)였다. 연노랑색의 바탕 위에 무사와 아기가 채색화로 그려진 멋진 표지의 만화책이었고 띠지에는 ‘극화계의 금자탑!!’이라 적혀 있었다. 나는 이 만화를 그린 만화가의 그림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 만화가는 인물들의 입술을 그렸다. 분노를 감추는 앙다문 입술, 퉁퉁 부르튼 입술, 육고기의 기름기가 치덕치덕 발라진 탐욕스런 입술, 여성을 탐하는 육욕의 침이 흥건하게 묻어 있는 입술. 그때까지 입술을 그리는 만화가는 본 적이 없었다. 힘찬 펜 선이 날아갈 듯 움직여서 인물들의 움직임을 표현한다. 등장인물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갈필로 표현하여 붓 끝에서 적당하게 마른 먹물이 인물의 감정을 표현한다. 무엇보다 이 만화가의 그림은 회화적이었다. 무엇보다 이 만화가의 그림은 인간의 육체를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진짜 극화였다. 그리고 초등학생 때 보았던 <봉화산의 팔도검객>이 떠오르며 이 만화가 바로 <봉화산의 팔도검객>의 원작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봉화산의 팔도검객>을 그린 백영철은 후일 백성민으로 개명하여 <장길산> 같은 만화를 그렸다. 그는 자신이 데뷔 시절에 일본 만화를 표절하여 그리는 만화가였다고 고백한다. 백성민은 일본 만화를 트레이싱페이퍼에 대고 그대로 옮기는 그런 만화가는 아니었고, 나름 일본 사무라이를 조선 검객으로 옮겨 그리는 고심을 했었다. 시대 배경을 임진왜란 이후로 잡아 기득권인 노론이 자신들의 정적을 암살하려는 야욕을 위해 자객 집단을 암암리에 키우고, 주인공 어린 조카를 데리고 다니는 검객은 그들과 대립한다는 설정으로 바꾸었는데 설득력이 있었다.
사악한 악당 아베 가이이가 좋았다
70년대 말에 내가 산 <아이 딸린 늑대> 단행본에는 연재의 막바지, 라스트를 향해 달려가는 에피소드들이 과하게 넘쳐나는 그림들이 담겨 있었다. 주인공인 오가미 잇토와 그의 아들 다이고로가 등장하는 에피소드는 3분의 1밖에 없었고, 흉악하게 생긴 악당 아베 가이이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었다. 만화책의 첫 페이지를 열면 피를 잔뜩 빨아들인 거머리 같은 입술을 한 뚱뚱한 중이 목을 매달고 있다. 물론 그는 죽은 것이 아니고 중도 아니다. 눈속임이다. 그가 속여야 할 야규를 기다리다 배가 고파진 그는 목을 매단 광목을 풀고 바닥 위로 떨어진다. 하필이면 자신이 얼마 전에 싼 오줌 위다. 손바닥에 오줌이 묻은 손으로 밥통을 열어 주먹밥을 뭉친다. 오줌이 간을 해줘 맛있다고 낄낄거린다. 도쿠가와 쇼군의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를 살피는 쇼군의 신하들 중 서열 오위 안에 드는 순역이란 직책을 가진 아베는 자신보다 서열이 높은 야규 가문을 와해시키고, 수배자인 오가미 잇토를 죽여 신분 상승을 꾀하려는 야욕을 지닌 자인데, 딱히 성공을 하려는 권력 의지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무라이들의 거들먹거림을 증오하는 야비하고 더러운 마음을 소유한 자이다. 그래서 야규와 오가미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실행하려다 실패하면 울면서 목숨을 구걸하고, 지체 높은 사무라이인 야규 레츠오에게 ‘너처럼 더러운 천하의 상놈을 죽이는 것은 내 사무라이 칼에 미안하다’라는 말을 듣는다. 사무라이라면 수치심으로 할복을 하겠지만 아베는 붙어 있는 목을 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돌아서면 또다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야규를 박살낼 생각으로 머리를 굴린다.
말하자면 <석양에 돌아오다>의 흉한(兇漢) 일라이 워락, <쿼바디스>의 야비한 배신자이며 밀고자인 그리스 거지 철학자 킬로 킬로니데스를 능가하는 최악의 악당이었다. 말도 안 되는 “비원의 길을 걷는 몸, 명부가도를 사는 몸, 육도사생의 저승길을 각오한 몸” 따위를 주절대는 주인공 오가미 잇토나 <마징가 Z>의 헬 박사의 모델이 된 야규 레츠오보다 나는 사악한 악당 아베 가이이가 좋았다. 그 시기에, 소니 베타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던 친구 집에서 일본 사무라이영화를 보고 잔혹함에 질려 한동안 일본 사무라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었다. 여자가 등장하면 강간 신이 나오고, 사무라이들은 배를 가르거나, 목이 머리에서 떨어지기 위해 등장하는 그런 영화였다. 특히 사무라이들의 할복은 이해가 되지 않는 끔찍한 짓거리였다. 아베 가이이는 제 꾀에 속아, 자신보다 훨씬 교활하고 야비한 야규 레츠오에게 속아 할복을 명받는다. 아베 가이이는 할복하는 꿈을 꾸고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술에 취해 곯아떨어져 현실에서 도망치려 한다. 할복의 날은 다가온다. 드디어 할복의 날. 사무라이들의 비웃음을 받으며 할복 장소에 무릎을 꿇고 앉은 아베 가이이를 향해 사무라이들이 비웃는다. 사무라이 신분도 아닌(아베 가이이는 순역인 사무라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역이 되었지만, 그는 어느 천민 여자의 몸에서 태어났다) 아베 가이이에게 할복을 하게 한 것은 분에 넘치는 쇼군의 은혜라며 할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아베 가이이는 할복을 거부하고 난동을 부린다. 그러자 사무라이들이 달려들어 그의 배에 칼을 꽂고 강제 할복을 시도하고 아베 가이이는 자신의 배에 꽂힌 칼을 뽑아 사무라이들을 찌르고 죽인다. 사무라이들의 칼에 난자되어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 아베 가이이의 시퀀스는 할복이란 것이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렇게까지 명예를 지키는 숭고한 행위가 아닌 구역질나는 짓거리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청소년 시기 아베 가이이의 할복 장면은 나에게 ‘이들은 왜 이런 짓을 할까’라는 의문과 잔혹함 때문에 깊이 각인되었고, 영화 <와일드 번치>에서 겁쟁이 낙인의 두려움과 타고난 악당들의 허세 때문에 죽음의 장소로 들어가는 늙은 악당들의 행위와 홍콩 무협영화의 주인공 왕우가 <대자객>에서 적들 앞에서 배를 가르는 행위는 사무라이들의 할복과 뭐가 다른지를 고민했었다. 그런 죽음 중 어떤 것은 매혹되었고, 또 어떤 것은 진저리를 치며 악몽이 될까 두려워했었다.
시간이 지난 후 잔혹한 일본 사무라이영화를 덜 진저리치며 보게 되었을 무렵, <아이 딸린 늑대> 만화책과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 <아이 딸린 늑대>(출시제목 <아들을 동반한 검객>)는 만화 속 오가미 잇토의 모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배우가 나와 실망하고, 싹둑 동강이 난 다리에서 피가 소방용 파이프에서 물줄기를 쏟아내듯 터져나와 ‘이거 악취미를 자랑하는 개그영화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냥 건성건성 보았다. 만화는 여전히 잔혹했지만, 청소년 시절 보았을 때만큼 악몽을 꿀까 두려워지는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유모차 양산”, “비오는 날” 같은 천민들의 고통에 대해 감상은 싹둑 잘라버리고 구구절절 설명도 덜어버린 담백하고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있어서, 원작자 고이케 가즈오가 기가 질리는 마초 남성 찬미자이지만 힘없는 자들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에피소드도 가끔 쓰는 사람이구나 했다.
매혹과 혐오가 뒤범벅된
고이케 가즈오의 “극화촌 학원”에서 만화 공부를 한 야마구치 다카요시의 <시구루이>의 잔혹한 첫 장면. 배를 가르고 주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내장을 드러내며 “배를 가르면 똥냄새 나는 내장밖에는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라 말하고 죽는 강렬한 첫 에피소드와 농민 출신 사무라이와 창녀의 몸에서 태어난 사무라이가 눈이 멀고 팔이 잘려서도 서로 죽음만을 생각하며 대결하는 무지막지한 사무라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이것은 2000년대에 다시 그린 <아이 딸린 늑대>라는 생각을 했었다. 미망에 빠진 자살적 죽음을 충의 또는 애국이라느니, 사무라이의 길이라느니 하며 미화하고 찬양하는 만화와 영화들은 수없이 많다. 그런 것들은 구토를 일으키게 만든다. <아이 딸린 늑대>는 망팔 사무라이, 즉 효제충신과 예의염치, 사무라이의 여덟 가지 덕목을 잊어버린 주인공 오가미 잇토를 통해 전투로 신분상승을 한, 상대를 죽여 피를 흘린 기억밖에는 없는 자들의 빈약한 내면을 숨기기 위한 치장을 허상이라고 그려낸 이야기라는 장점도 있지만, 죽음의 길을 가는 오가미 잇토의 내면을 표현하는 뜻을 알 수 없는 화려한 불교의 경구들은 오로지 복수만을 위해 잔혹한 행위를 하는 주인공의 행위를 구차하게 치장한다는 의심이 간다. <아이 딸린 늑대>의 세계는 죄는 무수하게 저질러지나 투박하게 죄의식을 지워버린 이상한 세계였다. 그나마 아베 가이이 에피소드가 유일하게 죄를 상기하게 만든다. 고지마 고세키와 고이케 가즈오는 데즈카 오사무가 만든 죄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는 세계를 단번에 지워버리는 데 대성공했다. <아이 딸린 늑대>는 그런 의심 때문에 반쯤은 매혹되었고, 나머지 반은 구역질이 났던 만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