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천년을 자축했던 샴페인의 거품이 채 마르지도 않았을 때, 시대와 동떨어진 듯한 책 하나가 한국 사회에 도착했다. 이름부터 낯선 <괭이부리말 아이들>은 인천 만석동 빈민촌 아이들의 생활을 그렸다.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다. 시대착오라는 일각의 비판이 무색하게도, 책은 현재까지 200만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한국 아동문학의 대표작이 됐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이 보다 특별했던 건, 책 속의 절절한 이야기가 작가 김중미의 상상이나 취재가 아닌 십수년간 만석동 아이들 곁에서 생활하며 경험한 바를 토대로 쓰여졌다는 점이다.
<괭이부리말 아이들> 이후 16년. 시간은 훌쩍 지났지만 김중미는 여전히 아이들과 함께다. 스물넷에 만석동 괭이부리말에 들어와 공동체를 만든 지 올해로 30주년이 됐다. 에세이 <꽃은 많을수록 좋다>는 1987년 기찻길옆아가방에서 이듬해 공부방으로, 그리고 2001년 강화도에서 농촌 생활을 시작해 강화와 만석동을 오가며 기찻길옆작은학교를 이끌어온 지난 30년을 기록했다. 아이들과 같이 보낸 시간이 켜켜이 쌓인 흔적에서는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주인공이다. 저마다의 결핍을 수줍게 드러내고 더불어 사는 삶의 소중함을 배우는 아이들의 옛 순간이 소환되는 한편, 공부방에서 자라 성인이 되어 작은학교를 도우며 연을 이어나가는 이들도 소개된다. 물론, 그들의 ‘공부방 이모’로서 차츰 나이테를 더한 김중미 역시 또 다른 주인공이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결국 불편하고 가난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대쪽 같은 신념은 한결같지만, 공동체 그 누구보다 가장 많은 성숙을 경험한 건 작가 자신이었을 것이다.
사회 저 아래에 사는 이들이기 때문에 공감의 아픔도 더 컸던 한국 현대사의 서글픈 순간들도 곳곳에 묻어 있다. <꽃은 많을수록 좋다>는 기찻길옆작은학교 아이들의 활동상을 담은 이미지들로 닫는다. 모종심기와 모내기, 인형극 워크숍과 캠핑, 강정마을을 응원하는 벽화, 4대강 사업 반대 플래카드…. 하나같이, 함께 모여 있는 사진들이다. ‘혹시 얘가 걔 아닐까?’ 하고 유독 마음이 갔던 아이들의 이름을 책에 대고 가만히 불러보았다.
기찻길 옆 작은 학교를 이끌어온 지난 30년
아무렇지 않은 척, 강한 척 숨기고 있던 상처를 건드리자 아주 오랜만에 아이가 울었다. 제 아버지가 열악하고 거친 환경에서 자라며 센 척으로 세상에 맞섰듯이 경우도 약하고 여린 마음을 숨기고 센 척을 한다. 경우는 공부방 이모한테는 자기 마음을 아무리 숨겨도 숨길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피하지 않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경우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 그때는 주먹을 움켜쥐고 그 주먹으로 세상을 살아갈지도 모른다.(229쪽)
아이들은 평화를 지키는 게 힘들다는 걸 안다. 참아야 하고,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조금 불편해도 평화가 더 좋다고 말한다. 공부방에서는 가장 약한 어린아이가 높임을 받는다. 그렇게 존중받아본 아이들은 자기보다 어린 아이가 왔을 때 그렇게 존중해준다. 평화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나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고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것이다.(2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