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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사실주의의 신흥 강자
송경원 2016-03-22

<스포트라이트>의 조시 싱어

<스포트라이트>

조시 싱어는 탐사, 자료조사의 스페셜리스트다. 캐릭터의 심정을 함부로 상상하지 않고 주변 정황을 최대한 꼼꼼히 조사하고 묘사한다. 절정의 한순간에 매달리지 않고 전체적인 균형과 차근차근 쌓아나가는 긴장감을 중요시하는 작가다. 건조해 보이지만 핵심을 놓치지 않는 대사의 맛이 발군!

영화 <스포트라이트>(2015) <제5계급>(2013)

TV시리즈 <프린지>(2009~11) <라이 투 미>(2009) <로 앤 오더: 성범죄전담반>(2007~8) <레인즈>(2007) <웨스트윙>(2003~6)

명실공히 올해의 승자다. 미국작가조합, 영국아카데미, 크리틱스 초이스, LA비평가협회, 그리고 올해 아카데미까지, 2016년 거의 모든 각본상을 휩쓴 <스포트라이트>는 탄탄한 각본의 출발점이 여느 영화와는 결이 조금 다르다. 특히 제88회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두 부문에서 수상했다는 사실은 영화의 핵심이 어디에 찍혀 있는지 정확히 알려준다. 고운 모직물처럼 촘촘히 구성된 각본의 구성이 작품의 형태로 고스란히 구현된 이 영화에서 대사는 정황을 보조해주는 도구가 아니라 영화의 본질 그 자체다. 때문에 다수의 각본상 수상은 단지 ‘잘 썼다’는 칭찬이 아니라 각본이 곧 연출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확인서가 아닐까 싶다.

토머스 매카시 감독과 공동각본을 쓴 조시 싱어는 이 작품 하나로 일약 할리우드가 주목해야 할 작가 리스트에 굵고 선명한 글씨로 자신의 이름을 추가했다. 그는 수상 소감을 통해 “자료를 모으고 또 모아 현실의 거의 모든 부분을 문자로 옮겨 담는” 기자에게 존경과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조시 싱어는 자신의 취재 대상이었던 기자들과 거의 비슷한 작업방식을 선보이는 각본가다. 이른바 현실을 최대한 현실적으로 모사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다. 공교롭게도 첫 작품 <제5계급>과 두 번째인 <스포트라이트> 모두 저널리즘에 관한 영화인데, 저널리즘 전문 작가는 아니지만 꽤 오랜 기간 그의 관심사가 언론의 작동 방식, 또는 사건 이면에 감춰진 사실들이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처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였다. 예일대 경영학과, 하버드대 로스쿨 출신의 조시 싱어가 각본가가 되겠다고 했을 때, 성공과 출세가 보장된 엘리트 코스를 버리고 가시밭길로 걸어들어가는 그를 격려한 건 부모뿐이었다. 하지만 싱어는 눈앞에 보이는 결과물 이면의 작동 과정을 살피는 것에 희열을 느꼈고 대학 시절, 창작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나온다는 룸메이트의 조언에 따라 일단 쓰기 시작했다. 무작정 찾아간 <세서미 스트리트> 워크숍이나 디즈니 TV애니메이션 제작부서 등 글을 쓸 수 있는 곳이면 어떤 일이든 맡았다. 본격적인 기회는 <웨스트윙>에 합류하면서 찾아왔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에 관한 짧은 아이디어에 만족한 프로듀서가 그를 전격 발탁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피소드 하나를 통째로 맡을 수 있었다.

정해진 틀 안에서 개별 에피소드를 맡을 수밖에 없는 드라마에 답답함을 느끼던 그가 영화로 관심을 돌린 건 특정 저널리스트-캐릭터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때 신문 제작을 했던 것도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저널리즘영화는 크게 보면 두 가지로 나뉜다. <제5계급>과 <스포트라이트>. 하나는 실패했고 하나는 제대로 전달되었다.” 조시 싱어는 두 영화의 구성 방식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설명한다. 두 영화의 본질은 신념에 의해 움직이는 저널리스트들의 행동양식을 최대한 거르지 않고 옮기는 것이었다.

다만 차이는 감독과의 팀플레이에 있다. <제5계급>이 줄리언 어산지보다는 그를 지켜보는 동료 다니엘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스포트라이트>는 스포트라이트팀 자체의 균형 감각이 두드러진다. 2012년 시작된 <스포트라이트>의 1차 초고는 2013년 6월경에 나왔지만 이후에도 토머스 매카시 감독의 거듭된 요청과 압박으로 몇년간 기자들을 쫓아다녀야 했고, 최후에 완성된 세트장에 몇달간 틀어박혀 글을 쓸 땐 전혀 다른 이야기로 거듭났다. 결국 이야기를 짜놓고 디테일을 채워 인물을 구성하는 게 아니라 옮겨 담을 수 있는 최대한을 옮겨 담은 후에 불필요한 부분을 덜어내는 극사실주의 방식에서 성패가 갈린 셈이다. 같은 태도, 한 차례 실패, 그리고 화려한 성공. 각본가로서 조시 싱어의 장단점은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다. 때문에 그가 앞으로 어떤 파트너를 만나 자신의 장기를 어떻게 유지해나갈지가 더 궁금하다.

명대사

“내가 한마디 해도 될까요. 가끔 쉽게 잊지만 우린 어둠 속을 구르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갑자기 불이 켜지면 모두 공평하게 창피해지죠. 내가 오기 전에는 모르겠지만 여러분은 모두 좋은 기사를 썼어요. 내 생각에 이 기사는 즉각적이고 심대한 충격을 줄 겁니다. 내겐, 이런 기사가 이 일을 하는 이유죠.”

영화 말미 성추행 사건의 진상 보도 직전 팀장 월터(마이클 키튼)가 이미 몇년 전 성추행 신부 명단을 받고도 보도하지 않았던 것을 고백한다. 자신들은 기자의 소명을 다했는지 묻는 월터에게 편집장 마티 배런(리브 슈라이버)이 남기는 이 대사는 <스포트라이트> 전체의 핵심이자 주제이며 제목의 의미이기도 하다. 언론의 당위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자제하던 영화는 이 순간 고해성사와도 같은 대사를 통해 목적을 달성한다. 조시 싱어는 이 순간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뒷부분의 분량을 상당히 추가했다고 밝혔다. 대사를 꺼낼 적절한 타이밍을 위해 원고를 몇번이나 뒤엎었다는 조시 싱어의 신중함은 기사 보도 타이밍을 두고 고민하는 스포트라이트팀의 고민과 닮았다.

차기작은 실존 인물 이야기

그의 관심사는 정확히는 저널리즘이 아니라 좋은 저널리스트다. “<제5계급>을 쓰면서 너무 즐거웠다. 많은 사람들이 미디어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데, 세상을 위해 애쓰는 저널리스트들을 위한 트로이의 목마가 되고 싶었다.” 사건 자체의 자극적인 전개보다는 그 사건 속에서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는 그는 항상 인물에 끌려왔다. 두편의 저널리즘영화 때문에 당연히 차기작도 언론을 소재로 한 영화일 거란 오해도 있지만, 조시 싱어가 지금 주목하고 있는 건 흥미롭고 상징적인 위인들이다. <위플래쉬>의 데이미언 셔젤 감독과 함께 닐 암스트롱에 대한 영화를 기획 중이고, 확정은 아니지만 마틴 스코시즈 감독과 레너드 번스타인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도 준비하고 있다. 스코시즈에게 연락이 왔을 때 물어보지도 않고 사인을 해서 지금 한창 공부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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