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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재일 할머니들, 식민지 전쟁 시대를 말하다
이다혜 2016-03-10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 가와타 후미코 지음 / 바다출판사 펴냄

올해부터 사용되는 초등학교 6학년용 사회과 국정교과서에 일본군 ‘위안부’라는 용어가 빠진다. ‘성 노예’라는 단어도 빠지고, 사진도 들어가지 않는다. 2014년 제작한 실험본에는 위안부 사진자료와 함께 “전쟁터에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의 성 노예가 되었다”는 사진 설명이 있었다. 초등학생 교육에 적합하지 않은 표현이라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변화라고 한다. 초등학교 6학년생과 나이 차가 얼마 나지 않던 소녀들이 위안부로 끌려갔던 역사적 사실을 떠올려볼 때, 이런 결정이 역사를 제대로 교육하겠다는 행동인지 의심스럽다. 이전 교과서에도 실리지 않았던 표현이라는 해명이 있었지만,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피해자도 피해 사실도 아니라는 것을 잘 모르는 것 같다는 생각만 든다.

이런 소식이 전해진 지난주, 일본 저널리스트 가와타 후미코의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를 읽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꾸준한 저작 활동을 해왔던 저자는 식민지 전쟁 시대를 살아낸 재일한국인 할머니들과의 만남을 ‘할머니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일본 월간지에 연재했고 그 글을 묶어 책으로 냈다. 일본에서 차별받는 재일 사회 안에서도 마이너리티로 오랜 세월을 살았던 할머니들. 재일 할머니들이 쓰는 표현 중에 ‘고생 자랑’, ‘가난 자랑’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신세타령’이라는 말도 자주 쓴다고 한다. 고생을 애써 웃어넘기려는, 할머니들의 한숨이 밴 단어들이다. 가와타 후미코는 할머니에 대해 쓴 이유를 “할머니들은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던 세계를 내게 보여주었기 때문이다”라고 밝힌다. 201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의 재일 버전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들이 많아, 어디까지나 말을 통해 글로 기록해야 하는 그 과거사가, 이 책에 담겼다.

재일한국인 양석일의 자전적 소설 <피와 뼈>가 오사카 지역에 자리잡은 재일한국인들의 삶을 남성 중심으로 보여주었다면 이 책은 여성 중심으로 들려준다. 김숙량씨는 여덟살 때부터 메리야스 공장에 다녔다. 양여선씨는 아홉살 즈음 장난감 공장에서 일을 시작해 열살이 되자 지퍼 공장을 다녔다. 김선이씨는 중학교까지 다닌 오빠 둘과 달리 소학교에 다니다 말았는데, 여자에게 교육은 필요 없다고 부모님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명숙씨는 소학교를 나와 원하던 학교로 진학할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조센징’이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일본에서 식민지 조선 사람으로 사는 일은 죽음의 공포와 싸우는 일이기도 했다. 도쿄대공습 때 살아남은 박봉례씨는 가정부 언니와 도망을 가다가 한쪽 손이 무거워 재촉을 하며 돌아보니 언니가 하반신에 소이탄을 맞고 죽어 있었다고 했다. 김문선씨의 막내오빠는 전사했다. 큰오빠의 설명에 따르면 자폭하는 1인용 배에 타고 적 함선에 돌진해 사망했다고 한다. 히로시마에 살았던 박남주씨는 열세살에 피폭됐다. 고름 가득한 대머리가 된 뒤 10개월 간 낫지 않았고, 종종 의식불명이 된다고 했다. 결혼한 뒤 낳은 쌍둥이는 간신히 일주일 동안만 숨이 붙어 있었다.

‘재일’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통은 더 있다. 남북이 분단된 이후, 한 가족 안에서도 남과 북, 일본을 선택한 사람이 갈리곤 했다. 김영순씨의 남동생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 북한으로 가는 귀국선에 올랐다. 한국의 어머니에게는 동생이 죽었다는 말을 여태껏 하지 못했다. 임영자씨는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이 모두 북한으로 가고 혼자 일본에 남았다. 22년이나 지나 동생들과 북한에서 재회했다. 배창희씨는 큰딸과 큰아들을 북한으로 보냈다. 박수련씨는 한센병에 걸려 아이들을 두고 요양소에 갔다. 재일한국인은 한센병 비율이 높은데, 한센병의 감염이나 발병에 영양과 위생 상태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송신도씨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였다. 임신, 낙태, 출산이 반복되었다. 그 사실을 알았던 남편은 “너랑 쿵짝거릴 바에야 개랑하는 게 낫겠다”고 말했고, 그 말은 잊히지 않았다.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이 흡족하지 못한 외교에 대한 자기변명으로 쓰이는 것을 보게 된 이 시대에, 할머니들의 노래를 듣는다. 위에 적은 경우들을 보며 지레 무섭다, 슬프다 생각하며 피하지 않기를 바란다. 할머니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목소리에는 회한과 당당함이 섞여 있다고 느꼈다. 이 노래를, 당신이 듣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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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할머니들, 식민지 전쟁 시대를 말하다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