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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속에 머무르는 동시에 벗어나기

샹탈 애커만의 회고전(서울아트시네마, 3월5~13일)에서 만나는 광기와 공허의 세계

샹탈 애커만.

지난해 10월5일, 샹탈 애커만이 세상을 떠났다는 갑작스런 소식은 모든 예술가들의 죽음이 그러하듯 거대한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보다 더 특별한 감정을 불러오기도 했다. 역설적으로 이러한 부재와 손실, 공허의 감각이 그녀의 작품에서 내가 전적으로 느껴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보다 더 정확하고 세밀하며 섬세하게 일상의 공허를 표현한 감독은 찾기 힘들다. 애커만의 자살은 그녀가 그동안 작품에서 보여준 바를 가장 슬픈 방식으로 직접 표현한 제스처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이 부재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범용한 나같은 이들에게는 망연자실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저 그 부재의 흔적을 다시 더듬어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 마을을 날려 버려>

스스로를 고립시킨 영화소녀

이 모든 것은 (영화에 한정하자면) 1950년 벨기에에서 태어난 (그녀 스스로의 표현대로) 평범한 한 소녀가 열여덟살 때 한편의 영화를 보고 자극받아 만든 영화에서 시작한다. 샹탈 애커만은 장 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1965)를 보며 감독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첫 번째 단편 <내 마을을 날려 버려>는 1968년이라는 상징적인 시기만큼이나 카메라의 시선과 특별한 위치로 주목할 만하다. 이 짧은 단편은 그의 첫 시작이자 마지막 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소녀는 이미 죽음에 사로잡혀 있다. 장소의 특별함이 돋보이는 데 가장 반드라마적 장소로 치부됐던 실내 공간, 특별히 부엌이 영화의 주된 공간이다. 브뤼셀의 작은 아파트가 무대의 전부다. 샹탈 애커만이 직접 주인공 소녀를 연기해 이동과 정주, 조증과 울증을 거듭하는 불안정한 상태의 여성적 주체를 특유의 제스처로 보여준다. 이는 그녀의 대표작 <잔느 딜망>의 자전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애커만은 집에 들어와 부엌에서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청소를 하다가 즐겁게 춤을 추고는 갑자기 울적해한다. 좁은 부엌은 요리를 하거나 청소를 하는 일상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그 질서가 교란되는 혼란의 장소다. 다른 한편으로 이곳은 유폐의 장소다. 그녀는 외부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킨다. 그럼에도 기이한 것은 집으로 돌아오는 소녀의 움직임에서 과도한 열정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기보다는 계단을 뛰어오른다. 이러한 조급함은 집에서 누군가 기다릴 상대가 있기 때문은 아닐 터다. 나중에 우리는 <밤과 낮>과 같은 작품에서 소녀가 자신을 기다리는 남자를 만나기 위해 숨 가쁘게 집으로 뛰어가는 장면을 보기는 한다. 하지만 이 단편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상대는 없다. 텅 빈 공허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도리어 이 거대한 무와 마주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쨌든 카오스와 질서, 유머와 공포, 코미디와 비극이 교차하면서 소녀는 자살에 이르는데, 이때 자살은 일상이란 공허에 파열을 내는 급진적인 시도처럼 보인다. 부엌은 그간의 영화들에서는 여성적 경험이 무언가 특별한 사건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말하자면 사건의 무대가 아닌 그런 가능성이 소진된 장소처럼 취급되어왔다. 애커만은 이러한 장소를 친밀함의 공유가 가능한 곳으로 변형한다. 이 방 안에 그녀의 삶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애커만의 기획을 1960년대 이래로의 영화의 여성적 (혹은 페미니즘적) 접근과 관련해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작가로서의 여성, 관객으로서의 여성이 영화 전면에 등장하는 일대 사건이 애커만의 영화와 더불어 시작했다. 이는 일종의 선언이기도 했다. 기성의 영화개념이나 영화문법에 대항하고 영화라는 제도 자체에 의문을 가하며 관객의 영화에 대한 기대나 습관적인 감상을 파괴하는 새로운 영화 만들기가 가능해지기 시작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미학을 해체하면서 여성적 주체를 생산할 가능성, 경험한 것을 (그러나 그간 표상되지 않았던 것들을) 제시하는 가능성으로서의 급진적인 영화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 애커만은 68의 아이였지만 영화의 소녀(cine-fille)이기도 했다.

<잔느 딜망>

인테리어의 예술이 만드는 교류의 장

이렇듯 애커만의 혁신은 많은 여성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여성 고유의 제스처와 태도, 신체의 영화라는 현대영화의 새로운 방식을 갱신해내는 것에 있다 하겠다. 그녀는 자신의 작업이 내용보다 스타일에서 페미니스트적인 영화라 말한다. 가령 여자의 몸짓을 영화에서 정확히 보여주려 했던 이유는 그 몸짓이 특별히 여성으로서 사랑스럽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몸짓이 항상 사회에서(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에서) 부정되고 무시되어왔기 때문이다. 애커만은 부정되고 배재된 여성의 일상에, 제스처와 태도에, 일상의 공간과 시간에 영화라는 장소를 열어주었다. 공허에 장소를 제공하는 일이다. 공유 불가능한 (여성적) 경험에 교류의 장을 열어낸 것이다.

하지만 영화라는 장소는 또한 닫힌 공간이기도 하다. 세 시간 반에 달하는 <잔느 딜망>은 그런 점에서 역설적인 영화다. 애커만은 집에서 일상의 시간을 반복의 규칙으로 영위하는 한 주부가 이윽고 작은 파열을 만들어내는 사건을 겪는 과정을 긴 지속시간의 촬영으로 담아냈다. 여인의 제스처와 몸짓들이 너무나 친밀해 필립 가렐의 지적처럼 관객인 우리는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 그 어느 날에 감자를 벗기면서 주인공 델핀 세리그의 제스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오래된 장식물로 가득한 그녀의 방은 일상의 공허로 가득한데, 한편으로는 그녀가 쉬는 장소이지만 동시에 세계로부터 닫힌 곳이기도 하다. 일종의 수인의 상황이다. 그녀는 늘 같은 장소에서, 나날의 시간에서 이어지는 동일한 행위를 반복한다. 감옥에 수감된 자가 처한 상황과 다를 바 없다. 감금이라는 평탄하고 무미건조한 반복의 일상을 견뎌내기 위해서 수감자들이 어떤 규칙과 질서를 만들어내듯이 여인은 또한 가능한 질서를 행위의 계열들로 유지하려 애쓴다. 파국은 그러므로 이러한 규칙과 질서가 작은 교란으로(물론 이 영화에서 그것은 작다고 말하기엔 큰 죽음이라는 사건이다) 무너질 때 발생한다. 여기에 두 가지 가능성이 제시된다. 그 하나는 닫힌 장소인 집을 벗어나는 불가피한 여정을 시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집이라는 공간에 더 친밀감을, 일상의 행위에 예술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집을 벗어나는 여정은 실제로 애커만이 시도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1971년 뉴욕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어머니와 나눈 편지 교환을 영화로 만들어 <집에서 온 소식>(1977)을 완성했다. <잔느 딜망>의 닫힌 공간과 달리 이 영화는 뉴욕 거리, 그리니치빌리지, 소호의 골목, 지하철역, 타임스스퀘어 등 다양한 장소로의 이동을 그려낸다. 애커만은 카메라를 든 여인으로 자동차, 지하철로 이동하면서 뉴욕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여기에 뉴욕의 딸에게 보내는 브뤼셀의 어머니의 편지가 내레이션으로 들린다. 이는 애커만의 이질적 현실체험, 특별히 떠도는 유대인의 시선과 감각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동시에 낯선 (공적인) 장소에 사적인 친밀감을 부여하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공적 장소에서의 취약함이란 언제나 애커만의 영화에서 느껴지는 보편적 정서처럼 보인다. <안나의 랑데부>(1978)에서는 주인공 안나가 자신의 작품을 상영하기 위해 독일에서 브뤼셀, 파리를 향해 열차로 이동하는 일이 벌어진다. 안나의 뿌리 없음과 정처 없음의 경험에는 작가 애커만의 내면이 투영되어 있는데, 그러나 이는 그녀의 고독의 경험을 초과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고독이 자신이 태어난 곳과는 다른 곳에서 살아가야만 했던 강제수용소의 끔찍한 과거를 지닌 어머니와의 감정의 교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밤과 낮>

아름답고 급진적인 사랑에의 열망

말하자면 애커만의 고독은 넓게 보자면 타인과의 친밀함을 공유하는 것으로 심화됐다고 볼 수 있다. 그녀의 모든 작품에는 타자와의 이런 감정의 교류와 친밀함의 시도가 있다. 그 때문에 나로서는 특별히 80년대에서 90년대에 이르는, 평자에 따라서는 다소 일탈적인 시도처럼 보이는 애커만의 작품들이 더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뮤지컬 코미디의 감각이 돋보이는 <폭풍의 밤>(1982), <80년대 갤러리>(1986), <밤과 낮>(1991)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특별히 그녀의 데뷔작을 떠올리게 하는 두편의 중•단편인 <춥고, 배고파>(1984)와 <브뤼셀에서의 60년대 말의 소녀의 초상>(1993)은 그녀의 정말 사랑스런 작품들이다. 이 영화들은 각각 파리와 브뤼셀을 배경으로 밤과 낮 사이의 시간을 돌아다니는 벨기에 소녀가 도시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애커만은 <춥고, 배고파>가 ‘내 친구와 나에 관한, 노래가 없는 작은 뮤지컬 코미디’라 말한 바 있다. 커플의 친밀함을 그린 애커만의 영화는 내실(인테리어)의 영화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한 두 극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지극히 고립된 한명의 인물로 향하는 경향이며, 다른 하나는 방이라는 장소에서 결코 떼어낼 수 없는 분리 불가능한 커플로 향하는 경우다. <춥고, 배고파>에서 우리는 두 번째 경향의 사랑스런 사례를 볼 수 있다. 파리에 도착한 두 벨기에 소녀는 파리의 낭만에 취하기보다는 ‘춥고, 배고프다’라는 생리적 현상에 시달리며 호텔에서 잠을 자고 레스토랑에서 먹기를 반복한다. 호텔에서 레스토랑으로, 혹은 다른 공간으로 불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장소들의 연결은 그들이 제대로 거주할 장소를 갖지 못했음을 부각한다. 그들을 환영하는 파리는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환대받지 못하고 있다. 대신, 두 소녀의 씩씩한 걸음과 무성영화를 연상케 하는 액션의 제스처가 둘의 친밀함과 동료성의 강력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공적 공간에서의 소녀들의 취약함. 그녀들은 잠자리도, 먹을 것도, 아마도 일할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소녀 커플은 씩씩한 걸음을 걷는다.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꽤 상징적이다. 누벨바그 감독들의 영화에서 인물들이 서로 사랑하고 철학을 논하는 파리라는 장소에서 애커만의 인물들은 국외자들의 정서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벨기에를 배경으로 60년대 후반의 시대를 살아간 소녀의 이야기인 아름다운 영화 <브뤼셀에서의 60년대 말의 소녀의 초상>에서도 반복된다. 학교를 빼먹고 새로운 삶을 결심한 소녀는 극장에서 우연히 만난 한 남자에게 친밀감을 느낀다. 그러한 장소에서 소녀들은 반복해 ‘나는 사랑에 빠질 것 같아’ , ‘난 너에게 다가가고 싶어. 너와 키스하고 싶어. 너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라 말한다. 이런 커플에의 무위의 감각은 두명의 남자와 밤과 낮을 바꿔가며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린 <밤과 낮>에서 가장 아름답게 표현된다. 이 영화에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단지 사랑만을 나누길 원하는 여인은 적극적으로 현실에서 벗어나 내실에 거주하려는 인물이다. 그녀는 친구도, 아이도, 이웃도, 직업도, 전화도 필요하지 않다. 밤과 낮의 구별도 거리와 내실의 경계도 별 의미가 없다. 단지 사랑하는 이와 침대가 있는 방에서 함께 있기를 원할 뿐이다. 비록 이런 연인들의 유토피아에의 시도가 실패할지라도 고립된 방에서 이토록 아름답고 급진적인 사랑에의 열망을 시도한 작품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저기>

어머니의 역사를 껴안으려는 시도

애커만의 영화 속 인물들은 고독하기에 사랑에의 열망으로 내실의 방을 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반대로 그러한 방에 스스로 고립됨으로써 특별한 일을 도모한다. 이는 데뷔작 <내 마을을 날려 버려>에서 이미 시도됐다. 여성적 일과의 반복을 퍼포먼스화하면서 애커만은 매일의 일상을 공허로 사라지게 하는 대신에 예술적 창조의 영역으로, 이러한 격리된 방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미학적 실험으로 확장한다(애커만의 방은 그러므로 그녀의 영화에서 중심적이고 문제적인 장소일 뿐만 아니라 미디어 아트, 전시적 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다). 특별히 이러한 고립은 <저기>(2006)에서 예술가의 창조성과 연결되고 있다. 영화 강의를 위해 이스라엘을 방문한 텔아비브 아파트에서 숨죽이며 창문 바깥으로 세계를 바라본다. 얼마 전의 테러 때문에 공포에 질려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그녀는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하지만 실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생과 너무 근접해 가까이 갈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녀는 왜 이곳에 가야만 했던 것일까. 이는 클로드 란즈만이 <쇼아>에서 수용소의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고 트레블링카를 방문한 것과 같은 이치다. 애커만은 이스라엘이 천국도 유배의 끝도 아닌, 여전한 내적 감옥이라 여긴다. 그녀는 집에 감금되어 있다. 표상 불가능성의 증명. 이 영화는 말하자면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 낯선 곳의 내실(방)에서 만든 <쇼아>다.

이런 점에서 <저기>는 애커만의 세 번째 국면의 작품이라 말해지는 <동쪽>을 시작으로 지난 세기의 집단 이주의 경험을 그린 일련의 영화들, <남쪽>(1999)과 <국경 저편에서>(2002)와 연결된다. 이는 한명의 작가가 지난 세기의 역사의 유산을 마치 개인의 짐처럼 껴안으려는 숙명적인 시도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이러한 운명은 그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녀의 장례식에서 랍비 델핀 호르비에는 그녀가 쇼아라 불린 재앙 이후에 태어난 아이로, 어릴 때부터 악몽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유령들과 함께 사는 것을 배워야 했다고 말한다. 그녀의 유작 <노 홈 무비>(2015)는 이를 고통스럽게 보여주는 영화다. 이 작품으로 애커만은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어머니의 침묵과 접촉한다. 폴란드 출신 유대인인 어머니는 15살에 아우슈비츠로 보내졌지만 가까스로 살아남아 벨기에로 이주했다. 애커만은 “나는 어머니가 수용소에서 나와 자신이 사는 집을 마치 스스로 만든 감옥처럼 만들어버린 것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혔다”고 고백한다. 수용소에 끌려갔던 어머니는 이에 대해 결코 말하지 않았고, 애커만은 그녀를 대신해 이를 증언하려 했다. 하지만 이는 그녀 말대로 미친 짓이기도 한데, 누군가 대신 그 체험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일종의 밀실이기도 한) 어두운 극장에서 이제는 세상을 떠난 모녀의 대화를(애커만의 어머니는 이 영화를 찍은 후 세상을 먼저 떠났다), 고통의 소리를 듣고 보는 것은 그렇기에 실로 힘든 일이다. 영화란 이토록 무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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