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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이제 더는 안 된다”
이송희일(영화감독) 일러스트레이션 김은희(일러스트레이션) 2016-03-01

그저 민망하고 남우세스럽다. 한국 야당 정치인들이 미 대선 돌풍의 주역인 버니 샌더스와 닮았다고 다투는 볼썽사나운 촌극이 벌어지고 있다. 좋게 봐서 정치 마케팅이지 사실 그 어떤 정치적 비전과 가치도 없다는 자학의 고백이기 때문이다. 시대를 읽는 혜안이 없으니 저 선거 열기만 생선가게 고양이처럼 탐욕스럽게 곁눈질하는 표정들.

그러나 버니 샌더스 열풍은 곁눈질로 커닝할 수 없는 논술형 시험문제에 가깝다. 얼마 전,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르몽드>에 기고한 것처럼, 샌더스 현상은 레이건에서 시작되어 지금의 오바마까지 지속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를 다른 형식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이다. 그 분석이 옳다. 미국 자본주의의 지층이 뒤틀리고 있다는 신호다. 대기업의 경제적 성과가 늘어나면 저소득층에도 혜택이 돌아갈 거라는 신자유주의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동안 최저임금은 40년째 동결되었고, 상위 1%의 부자들이 미국 전체 소득의 23.5%를 소유하는 미증유의 불평등이 초래되었다. 급기야 2008년 ‘금융 위기’가 발발하면서 슈퍼리치들에 대한 분노가 화산처럼 터져나왔다. 성난 젊은이들은 월스트리트를 점령했고, 곧이어 전국을 누비며 ‘최저임금 운동’과 ‘학자금 부채 폐지 운동’을 벌였다.

이때 분노한 젊은이들과 마주친 사람이 바로 버니 샌더스다. 40년 동안 변두리에서 외롭게 ‘사회주의’라는 라벨링을 감수하며 신자유주의를 비판해오던 백발 노인. 그 피륙처럼 일관된 삶이 신뢰의 밑천이었다. 샌더스의 주장이 나이브하고 성긴 것처럼 보이지만, 정확히 금융 자본주의의 목에 칼끝을 겨누고 있다. 선거 자금으로 들어오는 월가의 돈줄을 모두 거절한 채 월가 살생부를 돌리고, 슈퍼리치들에게 세금을 뜯고, 군산복합체 전쟁 기계들의 계좌를 이체시켜 시민교육과 의료제도를 정비하자는 저 백발 노인의 사자후에 젊은 유권자들이 열광하는 이유다. “이제 더는 안 된다”(Enough is Enough), 신자유주의와 다른 패러다임을 요청하는 그들의 구호다.

자본주의는 ‘구조적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 왼쪽으로 휘어지지 않으면 오른쪽으로 크게 휘어지는 양극단 사이에서 공명해왔다. 1929년 대공황에 대한 반작용으로 루스벨트의 뉴딜이 등장했듯, 2008년 금융 위기에 대한 대꾸로 루스벨트를 모사한 샌더스가 등장한 것이다. 샌더스는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망가진 미국 자본주의를 구원하러 온 외부 용병에 가깝다. 아마 샌더스가 좌절되더라도, 엘리자베스 워런을 비롯한 다른 샌더스들이 계속 소환될 것이다.

반면, 신자유주의 대표 주자들을 새로 영입하고 박근혜 원샷법에 찬성한 한국의 주류 야당들. 트럼프만큼이나 파시즘으로 수렴되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우편향에 반기를 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오리떼처럼 우향우, 우향우, 졸졸 뒤쫓아가기 바쁜 따라지 신세들. 공천권과 당리당략에 매몰돼 시대의 위기를 성찰하지 못하니 정체성마저 혼미해져버렸나 보다. 버니 샌더스를 닮았다고? 발가락이 닮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