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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이 땅에 영령을 모셔오고 싶었던 게 다다”
윤혜지 사진 백종헌 2016-03-01

조정래 감독 인터뷰

-전작 <두레소리>(2012), <파울볼>(2014)과는 사뭇 다른 방향의 영화다.

=기승전 ‘귀향’이었다. <두레소리>를 할 때도 <파울볼>을 할 때도 항상 <귀향> 이야기로 끝을 맺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만들고 싶지 않으면서도 언젠가는 만들어야 하는 영화였다.

-이슈보다 영화에 방점을 두었을 때 어떤 안배들을 했나.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다룬 다른 영화들은 거의 보지 못했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3부작은 좋은 참고가 되었다. 최근 들어 가장 깊이 자문하고 있는 건 내가 이 영화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느냐는 것이다. 어떤 작품을 보면 전쟁 중의 강간 장면이 아무렇지 않게 배경처럼 지나쳐가기도 한다. <귀향>은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영화이기 때문에 분명한 입장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혼돈 속을 헤매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소녀’였다. 여성으로서의 모든 것이 파괴되고 정신분열적인 상황에 처해질 수밖에 없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강인한 여성들이 서로를 구원하는 이야기였다.

-화가 형제인 임성철, 임원철이 각각 프로듀서와 미술감독으로 헌신했다.

=화가로서 알고 지내던 사이다. 처음엔 배우로 캐스팅하려 했는데 우리 영화 사정상 다들 1인 다역을 맡았다. 임원철 미술감독도 세트만 지으려다 미술감독까지 하게 됐다. 위안소 세트는 보관할 데가 없어서 일단 분해해뒀는데 버리지 말라 신신당부해서 일단 미술감독이 보관 중이다. <귀향>을 만들던 중에 어떤 분이 땅을 기증해주셨다. 거기 심어진 나무가 팔리는 대로 세트를 다시 올릴 생각이다.

-<두레소리>로 만난 함현상 작곡가가 또 음악을 맡았다.

=국악 활동도 같이 했고 기회가 된다면 언제나 함께 작업하고 싶은 파트너다. <두레소리> 만들 때 이미 <귀향>의 얘기를 한참 했었다. 오래전부터 <귀향>의 사운드디자인은 어떻게 할지 즐겁게 얘길 나눴었다. 나는 북을 치는 사람이라 그에게 음악감독을 맡아주십사 청했다. 사실 시나리오를 쓰는 것보다도 국악기를 이용해 음악을 구성하는 과정이 더 즐거웠다. 다음엔 국악 뮤지컬을 찍을 생각이다. (웃음)

-그외에 참고한 영화들도 있나.

=<쉰들러 리스트>(1993)와 <피아니스트>(2002)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다. 그 밖에도 스쳐지나가는 영화가 많다. 하지만 위안소의 비극은 ‘성노예’라는 말 자체의 끔찍함을 뛰어넘는다.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다. 전쟁범죄를 다루며 강간에 감상주의를 집어넣는 장면들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다. 실제로 일본군에겐 그저 유희일 뿐이었으니까. 일전에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는 택시 기사를 만난 적이 있다.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기에 사연을 물어보니 말인즉, 자신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을 때 양민을 학살한 적도 있고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여자를 강간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하더라. 심한 짓을 하긴 했지만 나름 사랑이 있었다고도 했다. 정말 화가 났다. 후회하듯 말하다가도 자랑조로 넘기는 것이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 같아 보였다.

-영화는 정해진 화자가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시선을 넘나들며 이어진다.

=내가 소리를 하던 사람이라 그런 것 같다. 악보를 짜듯 시나리오를 썼는데 판소리에선 주인공이 계속 바뀐다. 쭉 이야기를 진행하다가도 “한편”이라며 다른 얘기를 시작한다. 그것들의 모둠이라 생각했다.

-갈수록 소녀들은 독자적인 캐릭터에서 추상적인 ‘소녀’가 되어간다. 영매 은경만이 캐릭터를 유지하며 전체적인 흐름을 쥐고 있다.

=또 소리에 비유하자면, 은경은 <귀향>의 ‘도습’이다. 과거와 현재에 동시에 존재하며 영화를 끌어가는 해설자다. <귀향>은 은경의 자기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은경 역할을 해줄 사람을 찾아다녔나보다. 그 친구 눈빛이 참 신비하다. 모든 걸 꿰뚫어보는 것 같기도 하고, 눈 외엔 아무것도 없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은경을 성폭행한 자가 아무런 맥락이 없이 “막 출소한 전과자”라고 명시되는 장면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나친 단정이고 편견이다.

=그땐 못 느꼈지만 지금은 그 말에 동의한다. 성폭행의 재범률은 확실히 높고, 영화를 만들 당시 출소하자마자 바로 성폭행을 저지른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던 걸 보고 그대로 사용한 거였다. 성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남성의 심리가 과거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하나의 동기로 존재했을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장면에서는 내가 직접 전과자를 연기할 생각이었다. 남성으로서의 죄의식이 있었는데 그게 단편적인 속죄라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다들 반대해서 그만뒀지만. (웃음) 그런 일도 있었다. 누군가가 모 영화의 시놉시스 얘길 해줬다. 위안부 여성이 한 군인을 좋아하게 됐는데 자신으로선 줄 게 없어서 옷섶을 열어준다는 얘기였다. 그 얘길 하면서 그는 참 가슴이 아파서 울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구역질이 났고 당혹스러웠다. 하루 종일 마음이 괴로웠다. 안 만들어지길 잘한 영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노예 피해자에게 사랑?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내가 만나본 어떤 할머니도, 찾아본 어떤 자료에도 그런 말은 결코 없었다. 심지어는 그래도 즐겼던 순간이 정말 없었냐고, 지금 살아남은 할머니들은 그때 나름 ‘잘해준’ 사람들이어서 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 때리고 싶었다. 봉사활동을 하면서 할머니들한테 너무 동화된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땐 한동안 모든 남자들이 짐승처럼 보였다. 내가 <귀향> 취재를 시작할 당시 모 할머니께 ‘그래도 좋아하게 된 분이 없었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얼마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말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고 후회된다. 그런 기억에서 오는 죄의식도 컸다.

-하지만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이슈를 지나치게 악한 남성 대 선한 여성으로 이분화하고 있는 것 같다.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다.

-소녀들에게 정을 붙이는 일본군 다나카를 만든 이유는 뭔가.

=다나카 같은 캐릭터를 할머니들마다 한명씩은 기억하고 계셨다. 불쌍한 애들이었다. 전쟁 말미에 일제는 어린애들까지 전쟁에 동원했는데 그런 애들이 잡혀오듯 군대를 왔으니 그 심정이 어땠겠나. 편집이 많이 됐지만 원래 다나카도 주절주절 말을 많이 한다. 실제론 방에 들어와서 얘기만 하자는 군인도 있었고, 완전 어린애가 들어와 품에 안겨 계속 울다 나간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분명한 건 그게 사랑은 아니란 거다. 단지 인간으로서의 연민이다.

-세상에 나와 증언하는 것 자체로도 할머니들은 충분히 괴로우실 거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없는 듯 살고 싶을 수도 있다. 은경이 영옥에게 사진을 찍어주겠다 했을 때 영옥이 당황해했던 것처럼.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할머니들을 시사회에 모시는 것도, 나눔의 집에 영화를 틀어드리는 것도, 이용수 할머니께서 몸소 홍보를 돕겠다고 나서주시는 것도 다 싫고 미안했다. 더 많은 곳에 공개하는 게 맞겠지만, 이 영화를 그대로 어디론가 가져가 묻어버리고 싶다는 양가적 감정도 든다. 어떻게 해도 용서가 되지 않을 일이다. 강일출 할머니는 일본의 아베 총리가 와서 무릎 꿇고 사과를 해도 뒤통수를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고 하시더라. 고장난 테이프처럼 항상 같은 말을 반복하신다. <귀향>을 만드는 동안 나도 고장난 테이프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여전히 혼란스러워 보인다.

=답답하지만 지금도 시원한 해결책이 없으니까. 바람은 크지 않았다. 그저 이 땅에 영령을 모셔오고 싶었던 게 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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