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시간에 연습하고 항상 실내에서 공연하며 밤샘 작업도 없어요. 이 정도면 꽤 좋은 직업 아닌가요?” 우스갯소리지만 배우 윤공주는 인터뷰 도중 대뜸 뮤지컬 배우만큼 저녁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업도 없다고 이야기했다. 반어법일까. <시카고>의 록시 하트,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에스메랄다, <태양왕>의 프랑소와즈,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그리드 아르노 등을 거쳐, 뮤지컬 마니아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녀가 저녁 시간을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로 적셔야 했을지 쉬이 가늠조차 되지 않는데 말이다. 한 라디오 방송에서 배우 오만석은 그에 대해 “우리나라 뮤지컬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배우”라고도 말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정해진 시간 이외에 가장 열심히 노력했을 것 같은 모범생 배우 윤공주가 들려준 이야기는 이제 막 무대 위에 처음 올라선 신인배우의 경험담처럼 들렸다.
-‘공주’라는 이름이 본명인가.
=어릴 때 엄마가 “너는 못생겼으니 앞으로 예쁘게 자라라”라는 뜻으로 지어주셨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는 애들이 자꾸 놀려대서 제발 개명 좀 시켜달라고 조르곤 했는데 지금은 어딜 가나 주목받고 있어 이름 덕을 많이 본다. 기억하기도 쉽고. 그런데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모른다는 게 반전이다. (웃음)
-많은 배우들이 인정하는, 국내 뮤지컬 정상의 자리에 선 배우로서 너무 겸손한 발언이다.
=그렇지 않다. 감사하게도 함께 일하는 배우들이 가끔 그렇게 이야기해주는 것일 뿐이다.
-단국대 연극영화학과(2000학번) 재학 당시 처음 출연했던 뮤지컬 <가스펠> 이후 지금껏 꾸준하게 활동해서 무려 30편이 넘는 뮤지컬 무대에 섰다.
=졸업 후 1년에 2∼3편 정도 꾸준히 작업했다. 지치지 않느냐고? 일을 해야 오히려 힘이 나는 사람들이 있다. 나한테는 공연이 가장 재미있는 놀이다. 게다가 감사하게도 즐기면서 돈도 벌 수 있다. 바쁘지만 재미있으니 일이 없을 때에 오히려 지칠 것 같다. (웃음)
-함께 작업했던 남자배우들이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인지도를 쌓는 과정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봤겠다.
=뮤지컬계의 거의 모든 남자배우들과 한번 이상 작업했을 정도니까. (웃음) 조정석, 정성화, 정상훈 등은 자취방에 모여 합숙하면서 연기하던 신인 시절 때부터 함께해왔던 동료들이다. 각자의 개성에 따라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이 보기 좋다.
-스스로도 뮤지컬 외에 다른 매체로 진출해볼 욕심은 없었나.
=나뿐만 아니라 뮤지컬 여배우들은 대부분 뮤지컬만 한다. 장르를 고집한 게 아니라 아직까지 좋은 기회가 없어서였다. 언제든 좋은 작품이 들어오면 당연히 해야지. <씨네21> 인터뷰 읽고 연락이 올지 모르니 연기력 탄탄한 윤공주가 기다리고 있다고 써달라. (웃음)
-현재 공연 중인 작품은 미타니 고키 감독의 원작 뮤지컬 <오케피>로, 배우 황정민이 연출을 맡아 화제가 됐다.
=황정민 선배와는 예전에 <웨딩싱어>와 <맨 오브 라만차>를 함께 작업했다. 그때 좋은 인상을 남겼던지, 그의 아내이자 기획자인 김미혜 언니에게서 <오케피> 공연을 같이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다. 난 사람을 중시 여기는 편이라 두분만 믿고 어떤 작품인지도 모른 채 출연을 결정했다.
-일본 원작을 국내 정서에 맞게 각색한 작품이라 연기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연극과 영화를 오가던 미타니 고키 감독의 뮤지컬 데뷔작인데, 원작은 대사가 정말 많고 러닝타임도 4시간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일본 배우들이 연기할 때는 우리보다 대사 속도가 2배 빠르더라. 국내 관객이 낯설어할 것 같아 전체 러닝타임을 3시간 내외로 줄이면서 다양하게 변형시킨 한국말 대사를 살리는 데 집중했다. 원작의 기본 설정을 유지하되 국내 정서에 부합하는 단어와 어휘를 가지고 장난치는 재미가 있다.
-직접 연기하는 캐릭터 하프는 누구에게나 친절한 탓에 수많은 동료 단원들의 오해와 질투 속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왠지 여배우로 살아가는 본인의 삶과 닮은 점도 있어 보인다.
=여배우의 삶이 화려할 것 같다는 고정관념을 다들 가지고 있을 거다. 그 때문에 진짜 내 모습대로 행동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나는 워낙 그런 시선에 맞춰 행동하지 않고 나대로 사는 편이지만. (웃음) 하프가 정체성을 찾는 과정에서 많은 여배우들이 동질감을 느낀다. 사랑을 하고 싶어도 상처받을까봐 두렵고, 그러면서 외로움을 느끼는 심리가 하프의 솔로 파트 노래에 잘 표현되어 있다.
-학부 때 선후배들의 목격담을 들어보니, 윤공주 하면 언제나 운동장을 뛰는 모습이나 노래 연습하는 모습으로 기억된다는 사람들이 많더라.
=내가 그랬나? (웃음) 사실 난 노력형 배우에 가깝다. 겨우 1%밖에 타고나지 못했다는 걸 오직 노력으로 가리고 있는 정도? 매사에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또 체력 관리를 철저하게 하는 편은 아니지만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것이 무대에 오를 땐 도움이 된다. 예전에 연애할 땐 술을 가끔 마셨는데 이젠 전혀 안 마신다.
-그래도 가끔 갑갑하거나 나를 망가뜨리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
=그럴 땐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친구들을 만나도 마치 중학생처럼 한강에 나가 달리기를 하며 논다. (기자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휴대전화를 꺼내 동영상을 보여주며) 내가 이러면서 논다. (웃음) 웬만한 남자들보다 빨리 뛰어서 내기하면 항상 이긴다.
-오랜 무대 생활로 반복된 일상에 지칠 때는 없나.
=매일 연습과 운동을 하며 쉬는 날에는 카페 다니고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닌다. 매일매일이 조금씩 다르니까. 원래 공연 전에는 별다른 일을 만들지 않는데 최근 들어 레슨을 받으러 다닌다. 목이 너무 망가져서 기초 발성 레슨을 시작했다.
-아직도 배울 게 더 남아 있던가.
=지금보다 더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한 배움은 당연한 것이다. 레슨을 받을수록 조금씩 달라지는 나를 느낀다. 그동안은 힘 있게 소리를 질러 고음을 내면 그게 잘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소리가 잘 나오지 않게 됐고, 또 지난해에 <아리랑>을 함께한 김우형 배우가 어느 날 소리가 완전히 달라져서 왔더라. 그 모습을 보고 자극받아 선생님 한분을 소개받았다.
-누구에게서 어떤 수업을 받고 있나.
=전유훈 선생님이라고, 가만, 이름을 밝혀도 되나? 욕심 없이 평생 음악만 바라보며 사시는 분인데 국내 최고의 배우들이 모두 그분을 찾아간다. 선생님이 가진 악보로 기본 발성 연습을 하면서 소리의 질을 더욱 좋게 만들어주는 걸 가르쳐주신다. 얼마나 자주 레슨을 받느냐고? 내가 일주일에 몇번 가는지 다른 배우들이 알면 안 된다. (웃음) 공식적으로는 한번이지만, 그분은 요즘 내가 제일 자주 만나는 남자다. 선생님도 나보고 이 나이에 노래가 달라지는 게 쉽지 않은데 잘 따라오고 있다고 좋아하신다. 어릴 때는 공연이 잘 안 풀리고 어려우면 힘들고 막막하기만 했으나 이제는 당연히 배우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걸 안다. 하루하루 변하고 있는 모습이 재미있고 신기하다.
-뮤지컬 배우로서 언제가 가장 힘들었나.
=2009년? 지금도 종종 오디션을 보고 떨어지곤 하는데, 그땐 정말 볼 때마다 떨어졌다. <웨딩싱어>를 할 때였는데 하필 그때 사랑에도 실패하면서 아홉수를 제대로 겪었다. 배우가 참 이기적인 게 그 와중에 나의 아픔을 내가 연기에 이용하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제는 오디션에 떨어져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언젠가는 더 좋은 역할을 맡겠지.
-지금껏 연기했던 캐릭터 가운데 가장 연기하기 어려웠던 순간이 있었다면.
=2007년에 <맨 오브 라만차>의 주인공 알돈자를 연기할 때였다. 그녀는 피폐한 현실 속에서 몸을 팔아 돈을 벌어야 하고 또 꿈을 갖는 순간에 무참히 짓밟히는 삶을 사는 캐릭터다. 겨우 27살이었던 내가 뭘 알아서 그녀를 이해하며 연기했겠나. 선배가 하는 연기만 따라하면서 무작정 열심히 했는데 그때가 많이 힘들었고 또 기억에 가장 남는다. 그리고 가장 많이 배웠다. 29살, 31살 때도 알돈자를 연기했는데 여전히 쉽지 않다. 또다시 하면 더 잘할 것 같은 욕심나는 캐릭터다.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적이 없냐고? 내가 웬만해서는 힘들어하지 않는다. 체력이 워낙 좋아서. (웃음)
-지금도 여전히 맡고 싶은 캐릭터가 있나.
=지금에야 그런 아쉬움은 다 사라졌지만 <미스 사이공>의 킴,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 <위키드>의 엘파파 등은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었지만 아직까지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나를 필요로 하는 역할이 있다면 그게 최고의 역할이라 생각하고 주어진 것에 충실하려 한다. 게다가 <그리스>의 샌디 같은 풋풋하고 어린 캐릭터는 이제 영영 연기할 수 없을 거다. (웃음) <오케피> 이후 맡게 될 <삼총사>의 밀라디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하우가 있다면.
=열심히 하면 다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를. 똑같은 말인데, 하고 싶은 만큼 노력해보면 알게 될 거다. 보통 사람은 노력하는 사람을 못 따라가고 노력하는 사람은 또 즐기는 사람을 못 따라간다. 자신의 노력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어느 이름 없는 단원들의 이야기 <오케피>
미타니 고키 감독의 뮤지컬 <오케피>는 이름 대신 악기 파트로 불리는, 무대 뒤에 가려진 채 마치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소소한 삶을 들여다보는 드라마다. 연출을 맡은 배우 황정민은 각색 과정에서 보다 한국적인 정서를 자아낼 수 있도록 윤색했다. 12명의 단원들이 오케스트라 피트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이는 코믹한 소동극이면서 한편으로는 배우 윤공주가 연기하는 캐릭터 하프의 성장 스토리로 꾸며지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윤공주 자신은 “자꾸 내가 중심이 되면 안 된다. (웃음) 등장인물 모두의 성장담으로 봐달라”라고 하지만 가장 많은 분량의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하프에게 자꾸만 눈길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2월28일(일)을 끝으로 서울 공연은 막을 내리며 고양, 군포, 대전 등 3곳에서 공연이 이어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