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씨네21>의 진득한 독자들은 그레이엄 무어의 이름에서 대번에 컴퓨터공학의 토대를 마련한 수학자 앨런 튜링의 실화를 그린 <이미테이션 게임>의 각본가를 떠올렸을 것이다. 자잘한 스탭 명단까지 꿰는 이들이 아니라면,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맑은 눈으로 불우했던 과거를 고백하며 “이상해도 괜찮아요, 달라도 괜찮아요”(Stay weird, Stay different)라고 근사한 수상소감을 전했던 한 남자를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시나리오작가로서 세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그이지만, 그의 커리어는 2010년 소설 <셜로키언>에서 출발했다. 아주 잘 만들어진 이야기를 두고 “영화 같다”고 상찬하는 입버릇은, 그레이엄 무어의 다재다능한 행보를 두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셜록 홈스와 앨런 튜링을 연기했다는 점 외에도, <셜로키언>과 <이미테이션 게임>은 서로 닮은 구석들이 여럿 있다. 우선 두 작품 모두 시간의 선형적인 순서를 거두고 시대를 넘나들며 진행된다. 또한 앤드루 호지스가 쓴 앨런 튜링의 전기를 토대로 쓴 시나리오와 마찬가지로, <셜로키언>은 셜록 홈스의 이야기를 쓴 아서 코난 도일의 실제 삶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셜로키언>은 엄연히 픽션이다. 소설은 1900년대 아서 코난 도일의 실화와 2010년대 해럴드 화이트의 허구를 자잘하게 오가며 진행된다. 치밀한 취재로 얻은 자료는, 그레이엄 무어의 번뜩이는 상상력을 머금고 한 세기의 간격을 허문 유기적인 서사를 자랑하는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거듭나 단숨에 독자들을 빨아들인다. 두 남자의 곁에는 각각 (<드라큘라>의 작가) 브람 스토커와 또 다른 허구의 캐릭터 세라가 동행해 장편소설의 긴 호흡을 함께 채운다.
<셜로키언>의 전 챕터는 아서 코난 도일에 관한 짧은 인용문과 함께 문을 연다. 이들은 이야기에 더 깊숙이 들어가도록 돕는 한편, 코난 도일과 셜록을 향한 그레이엄 무어의 애정을 만방에 드러내는 표식이기도 하다. 이 책을 향한 가장 특별한 감탄은 “셜록 홈스를 알면 알수록 소설에 배어 있는 요소들을 더 많이 발견하게 될 것이다”류의 ‘덕력 인정’이 아닐까?
셜록 홈스를 향한 애정
홈스는 가스등 불빛과 담배 연기가 섞여 만드는 어둑함 안에 앉아 그날의 신문을 소화하고 파이프를 뻐끔대고 코카인을 주입했다. (…) 칼이 배를 찌르듯 무언가 그의 서재를 침범하기를 기다렸다. 그래서 모험의 약속이나 해석할 실마리나 아니면 풀지 못할 수수께끼라도 던져주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나면 그는 다시 이곳으로, 어두운 방으로 돌아와 하루하루 권태와 싸웠다. 어두운 서재는 그를 가두는 우리였고, 동시에 그의 천재성을 키우는 자궁이었다.(60쪽)
아서는 투명한 위액이 재닛의 입술에서 치마 위로 뚝뚝 떨어지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 소름 끼치는 것은 앞에 앉은 아름다운 여인의 배속에서 부글거리는 슬픔이 아니라, 아서 본인의 심장에 들어앉은 냉담이었다. 아서는 그저 아침 먹은 것이 소화되면서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트림만 느껴질 뿐이었다.(3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