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불안에 침잠하는 게 아니라 세계의 불안과 마주하고 있는 소설이다. 이 불안은 소설 속에서 어떤 인물도 무너뜨리지 못하며 또한 어떤 사건도 파국으로 이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은 지루하면서도 때론 희극적으로 반복될 뿐이다.” 한국 문단의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가 최정화의 데뷔작 <팜비치>에 대한 평. 2012년 겨울과 2015년 봄 사이에 발표했던 단편들이 묶인 첫 소설집 <지극히 내성적인>은 앞선 분석이 멀리까지 내다본 혜안이었음을 드러내는 증표다. 불안은 10개의 이야기를 통해 변주되며 한껏 뚜렷해졌고, 이는 고스란히 이제 막 단행본을 손에 쥔 소설가의 명백한 인장이 됐다. 그녀를 불안을 조용히 따라가는 소설가라고 부르고 싶다.
최정화 소설 속 불안은 다양한 사람들의 마음에 인다. 가정부 면접을 보러온 여자가 안주인 자리를 차지할 거라는 망상은 커지고(<구두>), 잘 나기만 했던 남편이 틀니를 하게 되자 그를 무시하게 되고(<틀니>), 위장한 애인 관계가 친구들에게 들킬까 눈치만 보고(<홍로>), 열다섯살 딸 아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곤란해하는 와중에 불안은 서서히 증폭된다(<타투>). 대개 상대방보다 원하는 게 더 많은 <지극히 내성적인>의 화자들은, 자기 문제를 벗어나지 못해 전전긍긍하거나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변화에 평소와 달리 낯선 태도를 취하면서 독자의 평온을 휘젓는다.
표제의 ‘내성적인’이라는 낱말은 독자보다 이야기 속 화자의 곁에 있는 이가 느끼는 분위기다. 주인공의 불안이 터질 기세로 부풀어 오르는 모습은 독자들에게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다가오는 탓이다. 책에 속한 모든 소설들이 전부 스무 페이지 남짓의 길이인 만큼 긴장은 빠른 속도로 이야기를 장악한다. 그리고 그 공기가 누그러지는 것 역시 순식간이어서, 결국 <지극히 내성적인>에 파국은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가 매번 지나는 어제와 오늘이 그랬듯이. 다만 최정화는 (더이상 기록되지 않는) 다음을 위한 여지를 남겨놓는다. 누군가는 불완전하다고 느낄 엔딩들. 그것들은 내일을 앞둔 지금의 기분들과 겹쳐 보인다.
불안을 조용히 따라가는 소설
당신이 나를 반겨 웃어준다면, 나는 조금쯤 쑥스러운 마음이 되어 책을 내밀겠습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고 다정하게 물어봐준다면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받았다고 생각할게요. 그리고 당신 소설의 첫 장을 펼치겠습니다. 거기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넣는 것으로 우리 함께한 지난날에 아름다운 마무리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얌전히 돌아갈게요. 그러나 나를 보고 당황하거나 혹은 내 얼굴을 기억하지조차 못한다면, 왜 여기에 왔느냐고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면 제 손은 주머니 속의 종이칼을 쥐게 될 것입니다.(159~160쪽)
이런 식의 문제에는 공감하기 힘들었다. 수학문제를 푸는데 무슨 공감이냐, 하고 묻는다면 문제를 풀 필요성이라고 해두자. 동기유발이라는 더 전문적인 용어도 있다. 그런 것이 없을 경우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