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과 간결함을 추구하는 예술과 문화적인 흐름’이라 정의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이라는 용어를 여러 번 들었지만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Minimalism’이라는 트위터 계정의 이미지들이 내 시선을 끌었다. 애써 노력한 흔적마저 지워버린 순간에 도달한 그 안정감은 요사이 내가 절실히 원하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나는 왜 갑자기 그런 가르침이 예사롭지 않게 느끼는 것일까. 뒤늦게 철이 들어서일까. 아니, 인간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아니면 시대의 징후일까. 시대의 징후를 추적하려면 서점에 가야 한다. 나는 교보문고에 가서 도서검색용 컴퓨터를 두드린 끝에 <미니멀리스트>라는 책을 찾아냈다. 잘나가던 직장에 사표를 던진 후, 편안한 소파와 책 몇권만 남긴 채 물질적 요소를 최소화하고 살고 있다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예술이 아니라 삶 자체를 미니멀하게 하자는 이야기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가지게 된 모양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간디, 이런 분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델리에 있는 간디기념관에는 그의 유품을 전시한 방이 있다고 한다. 잘 알다시피 그의 유품은 고작해야 슬리퍼, 안경 따위이다. 그런데 나와 이 시대의 사람들을 유혹하는 미니멀리즘은 간디의 그것과 비슷한 것일까. 아니다. 그 둘은 마치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실상은 매우 다르다. 내 보기에 이 시대의 미니멀리즘은 정보통신의 비약적인 발전과 노쇠한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허용한 ‘겨우 그러나 별 불만 없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아이폰의 단점은 세탁기나 냉장고 기능이 없는 것이라고. 0과 1로 변환할 수 없는 세탁기, 냉장고, 가스레인지, 에어컨을 제외한 모든 것이 우리의 손바닥에 놓여 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렇게 행복한 우리는 사실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다. ‘쥐꼬리만큼 자비로운 자본주의’에서 은행계좌는 월급이 스쳐가는 정류소다. 월급은 들어오기 무섭게 카드대금, 집세, 이자, 통신료 명목으로 거인들의 손아귀로 넘어가고, 우리는 남은 몇푼으로 그냥저냥 한달을 살아간다. 그런데 이 빠듯한 삶이 의외로 견딜 만하다. 무한한 콘텐츠와 끊임없는 커뮤니케이션의 자유가 ‘데이터 무제한’ 또는 ‘Wi-Fi’의 이름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요된 미니멀한 삶을 견딜 수 있고, 심지어 스스로 원한다고까지 생각한다. Wi-Fi 미니멀리즘은 이렇게 우리 시대의 당당한 삶의 패턴이 된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자본주의 기계에 생체에너지를 채취당하며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누워 있는 우리의 목숨을 연명시키기 위해 가상현실이 Wi-Fi를 통해 끊임없이 뇌에 주어지고, 우리는 그 매트릭스를 현실이라 믿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