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가 시작되기 직전 한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 청취자와의 전화연결 시간에, 며칠 뒤 시댁으로 갈 예정이라는 한 여성이 자신의 사연을 들려주었다. 시댁에 가는 것이 너무너무 싫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런 극심한 명절 스트레스 때문인지 “맏며느리인가 봐요?”라는 진행자의 질문에 급기야 “아뇨, 맏며느리는 아니고요, 남편이 그냥 장남이에요”라는,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식의 황당한 답변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모든 지표가 그렇게 나를 향해 있을지라도, 결코 맏며느리라는 단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솔직히 나 또한 지난 한달 동안 그런 마음이었다. “편집장이세요?”라는 질문에 “아뇨, 편집장은 아니구요. 그냥 최종 데스크를 봅니다”라고 답했을지 모른다. 1월1일이 지났지만 설 연휴가 오지 않았기에 아직 2016년은 아니라는, 그래서 당당하게 공표할 만한 새해 계획은 아직 미뤄둬도 된다는 일종의 안심 말이다. 그런데 이제 진짜 2016년이 열린 것이다. 편집장이 된 지도 1년이 지났고, 이제 지난해의 20주년 행사&별책에 이은 21주년의 무언가를 준비해야 한다. 누가 <씨네21>이라는 제호를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혹자는 그 숫자가 주는 상징성 때문에 21주년을 더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기대는 배반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일러두었지만, 어쨌거나 기획취재팀 모두 기존의 기획과 새로운 기획을 아우르기 위해 머리를 맞대보려 한다.
새해 들어 첫 번째로 본 영화가 뭔가 생각해봤더니, 공교롭게도 대니 보일의 <스티브 잡스>다. 인물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뭔가 일을 도모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자극을 주는 영화였다. 앞서 만들어진 조슈아 마이클 스턴 감독, 애시튼 커처 주연 <잡스>(2013)가 스티브 잡스의 대학교 중퇴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대기적 구성이라면, <스티브 잡스>는 에런 소킨의 역동적인 각본 위에서 마이클 파스빈더가 그야말로 신내림을 받아 춤을 췄다. 그래서 더 웃기고 신기했다. 전혀 스티브 잡스를 흉내낼 생각이 없는 배우가 의상과 안경은 나름 맞춰서 등장하니까.
이미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남우주연상을 받았지만, 정작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결과가 어떨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디카프리오를 좋아하면서도 그가 이제껏 아카데미 트로피를 들지 못한 것이, 이래저래 욕을 많이 먹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알고 보면 그래도 꽤 공정하다는 증거라고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공정’과 ‘동정’ 사이에서 디카프리오는 얼마나 긴장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그런 생각에까지 미치자, 지금 무슨 남 걱정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에 웃음이 난다. 아무튼 그렇게 진짜 새해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