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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라
정리 김수빈 사진 오계옥 2016-01-14

최동훈 감독의 KAFA+스토리텔링 마스터클래스 지상중계

최동훈 감독.

<타짜>(2006)의 맛깔나는 대사와 <도둑들>(2012)의 매력적인 캐릭터들은 어떻게 탄생한 걸까. 지난 12월18일 CGV압구정에서 한국영화아카데미가 주최하고 CGV아트하우스와 <씨네21>이 함께하는 KAFA+마스터클래스가 열렸다. 이날의 마스터클래스는 창작자들이 자신만의 스토리텔링 노하우를 공유하는 스토리텔링 마스터클래스로, 충무로 최고의 이야기꾼 최동훈 감독이 그 세 번째 마스터가 되어 강단에 올랐다. 최동훈 감독은 알토란 같은 다섯 작품의 제작기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구축해나가는 자신만의 방식에 대해 가감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범죄의 재구성>

<범죄의 재구성>

<범죄의 재구성>(2004) 시나리오를 고민하던 차에 어느 영화제에서 오승욱 감독을 만났다. 언제나 선배 감독을 만나면 요새 무슨 책 보고 있냐고 묻고 사서 보는 게 습관이다. 오승욱 감독이 “고려원에서 나온 <앤더슨의 테이프> 봐. 교보문고에 두권 남았어” 하고 가셨다. (웃음) 이 책은 진술, 법정기록, 도청테이프, 메모, 계약서 같은 것들로만 이뤄진 소설이다. <범죄의 재구성>을 스토리의 중간에서 시작하고 많은 부분은 진술과 플래시백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잡혔다.

시나리오를 4고쯤 썼을 때 차승재 대표에게 보여줬다. 시나리오가 너무 복잡하고 왜 이렇게 대사를 못 쓰냐고 하셨다. 못 쓴 것일 수밖에 없는 게, 모든 인물들이 나처럼 이야기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걸 듣기 시작했다. 전철, 버스에서 옆 사람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차 대표에게 주변의 사기꾼을 소개해 달라고도 했다. 시커먼 아저씨들이 카드를 치고 있는데 그분들 이야기가 장난이 아닌 거다. 듣고 있다가 몰래 화장실에 가서 막 쓰고 다시 10분 있다가 또 가서 쓰길 반복했다. 아저씨들이 그러셨다. “젊은 놈이 전립선이 그렇게 안 좋아서 어쩌나.” (웃음) 그렇게 <범죄의 재구성> 대사를 고쳐 썼다.

<타짜>

<타짜>

방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 것인가. 유치한 생각인데, 화투가 10장이니까 10개의 거대 시퀀스로 나누면 풀리지 않을까 싶었다. 또 <범죄의 재구성>처럼 스토리의 3분의 2 지점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속초의 값싼 방에서 시나리오 초고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말해보고 말이 되면 시나리오를 쓰러 간다. 내용이 후져도 상관없다. 일단 쓰면 된다. 정말 쓰레기 같은 초고를 가지고 와서 얼마나 못 썼는지 자학하며 하나씩 고치기 시작하는 거다.

<타짜>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고니(조승우)가 정 마담(김혜수)을 처음 만나는 장면이다. 고니가 정 마담한테 가서 술을 한잔하자고 한다. 그러면 정 마담이 “오케이” 하고 노란 배경의 방으로 들어오는데 핸드백을 들고 가다 2초 멈칫하고 프레임 아웃하는 장면이 있다. 이 여자가 ‘얘랑 술먹으러 가면 인생이 변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단 느낌을 주고 싶었다. <타짜>는 여러 면에서 관객에게 많은 설명을 하지 않는 영화다. 저 밑에 있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 뉘앙스들이 영화의 재미를 해치지 않았으면 했다. 소극적으로 조금씩 보여주고, 그런 것들이 영화 전체 정서를 만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우치>

<전우치>

<범죄의 재구성>의 ‘쿨함’과는 다른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때 떠오른 게 <암살>(2015)과 <전우치>(2009)다. <암살>은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조카에게 ‘전우치’ 이야기를 해줬더니 그렇게 재밌는 걸 처음 들어 본다는 식으로 말똥말똥 쳐다봤다. 나도 최면에 걸려서 ‘이게 재밌구나’ 싶었다. 내가 <삼국유사>를 좋아한다. <삼국유사>의 세계관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타짜>가 560만 관객을 넘고 상도 많이 받으니까 사람들이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촬영을 할 때면 ‘똑똑한 감독이니까 다 알아서 할 거야’라고 생각한 거다. 난 전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의 조언도 줄어들고, 많은 조언을 해주던 아내(영화 제작사 ‘케이퍼필름’의 안수현 대표)는 당시 박찬욱 감독의 <박쥐>(2009)를 제작한다고 바빴다. 스스로 반성을 많이 했다. 아무도 조언해주지 않으면 나는 볼품없는 감독이 될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도둑들>

<도둑들>

<타짜>를 준비할 때 알게 된 분이 말하길, 자기가 도둑을 한명 아는데 조세형보다 더 대도란다. 지금은 아파트 경비원인데 그분이 있는 아파트는 도둑이 절대 안 든다는 거다. 도둑의 심리를 너무 잘 알아서이기도 하고, 복도형 아파트는 대부분 시간제한등이 있어서 사람이 지나가면 켜졌다가 얼마 후면 꺼지는데, 도둑이 지나가면 시간제한등이 계속 켜졌다 꺼졌다 한다는 거다. 그 이야기를 듣고 도둑에 대한 영화를 찍으면 재밌겠단 생각을 했다.

대학 때 미셸 푸코가 쓴 영화 <카사블랑카>(1942)에 대한 비평을 읽은 적이 있다. 1942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어떻게 지금까지 사람들이 찾는 영화가 됐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푸코는 <카사블랑카>가 사랑, 배신, 우정, 전쟁, 애국심, 이국성, 스파이, 명예, 유머 등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고 봤다. <도둑들>에 전쟁은 없으니까 전쟁과 애국심은 빼고, 이 영화를 사랑, 배신, 음모, 우정, 이국성이 넘쳐나는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사람들은 보통 ‘연기파 배우’ 그룹이 있고 등장하자마자 주인공을 하는 그룹이 있다고 한다. 나는 이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연기파 배우’라는 표현부터 이상한 게 그럼 ‘조리파 요리사’도 있어야 하는 거다. <도둑들> 캐스팅 때 내 관심사는 연기를 잘하냐 못하냐가 아니라 매혹적인가 그렇지 않은가였다.

<암살>

<암살>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 안에 안창호 선생이 살던 집이 있다. 그곳에 선생의 수많은 사진들이 있는데 오렌지를 따다가 바구니를 놓고 찍은 사진이 있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이들에게도 일상이 있었을 테고 행복해지고 싶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 시대가 복잡하고 어려운 시대지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도둑들> 시나리오 작업을 함께했던 친구와 공부하면서 (<암살>의 시나리오를) 쓰고, 쓰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시나리오를 쓰는데 어느 순간 물밀 듯이 공포감이 밀려왔다. 영화가 ‘쿨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그때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한편 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래서 <암살> 작업을 접고 런던으로 갔다. 런던에서 작가와 회의를 하며 시나리오를 발전시켜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작가는 하루에 몇번씩 이렇게 말했다. “이러면 스튜디오가 싫어할 텐데.” 회의를 할수록 ‘스튜디오가 이걸 싫어할 거야’가 아니라 이제 ‘스튜디오가 너를 싫어할 거야’로 변해갔다. (웃음) 재미가 확 없어졌다.

<설국열차>(2013)가 개봉했을 때 틸다 스윈튼을 만났다. 자기 집이 스코틀랜드에 있으니 언제든 오라고 했다. 런던에서의 작업을 접고 아내와 틸다 스윈튼의 집으로 갔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싸워서 졌음에도 자부심이 대단하다. 격전지들이 다 관광지, 유적지로 보존돼 있다. 스코틀랜드의 여러 동상과 협곡을 보는데 <암살>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가 왜 마음에 안 들었는지 조금씩 알 것 같았다.

나는 큰 철학이 있는 건 아닌데 딱 하나 믿는 건, ‘이걸 하면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보통 스튜디오에서 영화를 만들 때는 점수를 매긴다. 관객이 좋아할 거라는 유형의 영화들이 있다. 난 이게 허구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관객은 언제나 새로운 걸 보고 싶고, 약간의 틀을 깨는 걸 보고 싶고, 또 그게 재밌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암살>은 충무로에서 소문이 너무 안 좋았다. 별명은 ‘암실’. 영화가 너무 어두워서다. ‘엄살’도 있고. (웃음) 그런 말들보다 관건은 무조건 내가 재밌어야 한다는 거다. 영화를 찍을 때 보통 3년 정도 걸리는데 그 시간이 즐겁기만 하다면 관객도 다 재밌게 볼 수 있을 거다. 충무로에 떠도는 수많은 말들을 믿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맞다’고 믿고 그런 말들을 무시하고 가는 게 영화를 만드는 가장 좋은 길이라 생각한다.

마스터클래스 Q&A

-시나리오를 몇번이고 고쳐 쓸 수 있는 힘은?

=시나리오를 팔려면 어쩔 수 없이 쓰게 된다.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 최고의 극작가다. 대본을 써서 주니 배우들이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때 안톤 체호프가 말했다. “미안합니다. 다시 써서 오겠습니다.” 그리고 고쳐 썼다. 시나리오를 고치는 것에 대해 전혀 쪽팔려 하지 않는다.

-매력적인 캐릭터를 구축하는 방법은?

=빌리 와일더가 말했다. 영화의 캐릭터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보다 창문을 깨고 들어오는 게 더 흥미롭지 않냐고. 캐릭터를 알려주는 방식이 달라야 한다. 평범한 등장을 싫어한다.

-좋은 아이템이란?

=결말이 있어야만 모든 아이템이 완성된다. 결말이 짜맞춰지는 순간 진짜 좋은 이야기가 될 거다. B급 코믹영화를 찍고 싶다면? 난 모든 코미디를 빌리 와일더에게 배웠다고 생각한다. 빌리 와일더의 작품을 보라. 그리고 사람들을 웃기려 하지 않으면 될 것 같다. 노력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웃는다. 달수 선배를 써라. (웃음)

-1920년대 만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찍고 싶은 생각은?

=영화라는 건 관객에게 새로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 의열단에 대한 영화를 누가 하나 더 만들어줬으면 좋겠다. 아무도 안 만들면 내가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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