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우리에게 여전히 미지의 대륙이다. 흔히 서구영화라는 범주로 묶을 때 오랜 역사와 전통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영화는 생략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영화의 역사를 논할 때 러시아영화를 생략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부터 지가 베르토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를 지나 알렉산드르 소쿠로프까지, 영화 문외한이라도 이름은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러시아의 영화작가들은 할리우드나 유럽영화와는 또 다른, 독자적이고 견고한 미학을 구축해왔다. 세계영화의 지형도를 그린다면 러시아는 변방이 아니라 상당한 영토를 확보한 영화왕국으로 불려야 마땅하다. 올해 러시아의 할리우드로 불리는 모스필름 90주년을 맞이한 덕분인지 러시아영화를 소개하는 책 몇권이 연이어 출간됐다.
입문서를 찾는다면 데이비드 길레스피의 <러시아 영화: 문화적 기억과 미학적 전통>을 권하겠다. 데이비스 길레스피는 영국 배스대학교에서 오랫동안 러시아 문화와 영화를 연구해왔다. 20세기 러시아영화의 주요 작가와 작품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이 책은 러시아영화의 광활한 영토를 훑기에 적합하다.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을 비롯한 소비에트 몽타주영화를 시작으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포스트 소비에트 상황에서의 영화까지 전반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수백편에 이르는 작품들을 분류, 장르별 역사를 고찰하는 이 책은 러시아영화의 아카이브를 그릴 수 있도록 돕는다. 특히 책의 마지막 장은 특별히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세계를 심층적으로 다루는데, 저자의 헌사로 봐도 무방하다. 이 책의 번역자인 라승도 교수가 쓴 <시네마트료시카>를 보론으로 삼아 읽어도 좋다. <시네마트료시카>는 영화로 보는 오늘의 러시아, 특히 2000년대 푸틴 시대의 러시아영화에 주목하는 책이다. 두권을 함께 읽는다면 러시아영화의 어제와 오늘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폐허의 시간>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계보를 잇는, 현존하는 러시아 최고의 영화작가 알렉산드르 소쿠로프를 심도 있게 분석한 책이다. 9명의 필자가 쓴 각기 다른 9편의 글을 묶은 이 책은 작품별 분석은 물론, 그 속에 녹아든 소쿠로프의 철학과 삶의 궤적을 통시적으로 조망한다. 조르주 니바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쿠로프는 그저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가 세계의 가장 깊은 본질로, 그 세계에의 예감 가운데로 파고들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소쿠로프에게만 국한되는 정서가 아니다. “아름다움이 세계를 구한다”던 도스토옙스키의 정신은 러시아영화, 러시아 작가들의 영혼 아래 면면히 흐르고 있다. 첫걸음이 어려울 뿐이다. 낯설어 선뜻 발을 디디지 못했던 러시아 대륙에 발을 디딘 순간 그전에는 체험해보지 못했던 새로운 영화세계에 흠뻑 빠져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