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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킹 감독의 <사랑의 흔적>
2002-03-21

글의 영광은 사라지고

Beloved Infidel 1959년, 감독 헨리 킹 출연 데보라 카<EBS> 3월24일(일) 낮 2시

“<위대한 개츠비>를 세번 읽은 사람이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다.” 어느 소설에선가 쓰인 문장이 새로 출간된 <위대한 개츠비>의 홍보문구가 되었다고 한다. 소설의 역사적 의미에 관한 이야기는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겠지만, F. 스콧 피츠제럴드라는 작가의 삶이, 어느 스타보다 화려한 조명을 받았으며 그만큼 명암도 깊었다는 건 분명하다.

로스트 제너레이션, 즉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적 이상을 상실한 세대의 대변자였던 피츠제럴드는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법한 성공을 맛보았고, 쾌락과 향락의 세계에 깊숙이 잠겨들었다. 소설의 인세를 단 며칠 동안 술값으로 모조리 탕진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 미국적 꿈의 허상을 조롱하면서 피츠제럴드는 역설적으로 작가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역사상 가장 멋지고 화려한 술잔치”에 열중했던 셈이다. <사랑의 흔적>은 F. 스콧 피츠제럴드가 임종을 맞기 직전의 순간을 옮긴 전기영화다.

칼럼니스트로 일하는 세일라 그레이엄은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우연히 만난다. 그는 병원에 입원한 아내의 치료비, 딸의 양육비를 마련하기 위해 할리우드로 온 것. 틈틈이 새로운 소설을 구상하던 피츠제럴드와 그의 조수가 된 그레이엄은 서로 의지하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피츠제럴드는 예전에는 이름을 날리던 작가였지만 전만큼 평가를 받지는 못하는 처지로 전락한 지 오래다. 경제적인 부담이나 작품을 쓰는 것에 대한 부담 등으로 피츠제럴드는 조금씩 술을 가까이 하고 그레이엄과 잦은 말다툼을 벌인다.

<사랑의 흔적>은 세일라 그레이엄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 그레이엄과 피츠제럴드의 애정사를 꼼꼼하게 묘사한 원작을 바탕으로 <킬리만자로의 눈>(1952)의 헨리 킹 감독이 연출했다. 원작자의 의도를 충실하게 반영한 탓에 피츠제럴드와 그레이엄의 연애담은 수려하게 각색되었다. 둘은 파티에서 만나 첫눈에 호감을 느끼고, 그레이엄은 그의 재능에 금세 반한다. 그렇지만 소설가의 글솜씨는 퇴락의 징조가 깊다. “그냥 돈벌기 위해서”라는 변명을 내세워 할리우드에서 영화시나리오를 써내려가지만, 마땅한 돈벌이가 될 것 같지도 않다. 남은 건 술과 여자, 그리고 묵직한 공허감이다.

<사랑의 흔적>은 엄밀하게 보면 전기영화라기보다 멜로드라마의 외형에 근접한다. 격정적으로 사랑에 빠져들면서 여성으로서 자존심을 끝내 고수하는 그레이엄 역의 데보라 카는 <어페어 투 리멤버>를,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피츠제럴드 역의 그레고리 펙은 어쩔 수 없이 <로마의 휴일>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어느덧 중년에 접어든 배우이지만 데보라 카와 그레고리 펙이 해변과 거리에서, 도심의 야경을 배경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꽤 스릴있고 운치있다.

<사랑의 흔적>의 커플은 예정된 결말을 맞이한다. 남자는 죽고, 여자는 남는다. 젊은 시절의 영광을 뒤로 한 채 F. 스콧 피츠제럴드는 쓸쓸하고 조용한 죽음을 맞이한다. <사랑의 흔적>은 오만한 냉소주의자이자 도회적 세련미를 숭배하고 언어의 조탁에 탁월했던 이단아(Infidel)를, 그의 몰락을 지켜본다. 세상 무엇보다 그의 ‘글’을 깊이 흠모했던 한 여성의 눈을 통해. 김의찬/ 영화평론가 wherever70@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