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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에 대해 지금 느끼는 것들
이화정 사진 백종헌 2015-12-29

서울에서 만난 이와이 슌지 그를 통해 보는 일본영화계의 현재

이와이 슌지 감독은 그간 제작, 프로듀서 역할과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연출을 하며 다양한 활동을 해오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극영화 개봉 소식이 뜸해 궁금증을 모아왔다. 그런 그가 최근 <하나와 앨리스>(2004) 이후 12년 만의 극영화 신작 <립반윙클의 신부>로 국내 개봉 소식을 전해왔다. 12월10일부터 11일간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와 엣나인필름이 공동주최하는 ‘이와이 슌지 기획전’에 참석차, 신작 후반작업 중 한국을 찾은 그를 만났다.

-<러브레터>(1995)가 제작된 지 올해로 20주년이 된다. 이번 기획전은 초기작부터 국내 개봉하지 않은 다큐멘터리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2011)과 <뱀파이어>(2011)까지 모두 아우르는 터라 관객에게도 더없이 뜻깊은 기회다.

=처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게 1999년, <4월 이야기>(1998)를 통해서였다. 한국은 내게 홈타운 같은 그리운 장소다. 이번 기획전에 그리운 마음과 반가운 마음이 교차되어 있다. 어제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데 그들에게서 뜨거운 시선을 느꼈다. 정말 내 작품을 많이 사랑해주는구나 싶더라.

-5월 개봉한 애니메이션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 외에 그간 극영화 소식은 뜸했다. 특히 <뱀파이어>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던 2011년은 3•11 대지진이 일어난 해였고, 그때 극영화에 대한 고민은 잠시 뒤로 미루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치기도 했다.

=대재해를 겪고 나면 사람이 변한다. 일본에서 지진은 당장 언제 일어나도 놀라지 않을 현실이다. 일본인 모두가 불안감을 가슴에 품고 살고 있다. 그런 불안함과 슬픔을 등에 지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 재가동은 지금도 일본 사회의 이슈가 되고 있고, 거기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그런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다.

-원전 사고가 난 센다이 출신으로, 3•11 대지진 이전부터 쭉 탈원전운동에 관심을 가져온 걸로 알고 있다. 다큐멘터리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에서 후쿠시마 원전에 반대하는 학자, 저널리스트, 영화감독, 배우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직접 찾아가 그들의 견해를 구한다. 극영화를 통해 늘 절제된 감정을 보여줬다면, 다큐멘터리에서는 ‘미디어의 거짓이 SF영화 같았다’며 언론과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다. 다큐멘터리 속 인터뷰이로 등장한 감독의 모습이 더없이 친근해 보였는데, 결국 비극의 한가운데 감독이 발견한 건 뜻을 같이하는 친구, 즉 사람이었다(<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은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일본에서는 TV 방송과 원전 사고 1주년 추모로 공개되었다).

=사고로부터 벌써 4년이 지났고, 그사이 사람들의 상처와 아픈 기억이 많이 치유됐다고 보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의 일본을 보면 상처 입은 말이 연상된다. 한쪽 다리에 상처를 입은 말이 힘들게 일어서려 노력하지만, 당연히 그게 잘되지 않는다. 다들 잘해보려고 울부짖어도 보고 화도 내보고 의심해 보기도 하는 그런 불안하고 혼란한 상태다. 재해 직후에는 일본인들이 정에 대해서 많이들 이야기했다.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서 위기를 극복하자고 했는데 그때뿐이었다. 여전히 일본은 불안한 상태다.

<립반윙클의 신부>

-그 불안함이 일본영화계에 끼친 영향이 상당했다고 본다. 3•11 대지진 직후 제작이 중단되거나 유보된 작품들도 많았고, 만들어진 작품 안에도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죽음’에 무조건적인 희망을 보내는 시선도 없지 않아 보였다. 작업 중인 극영화 <립반윙클의 신부>에도 그런 영향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3•11 대지진 이후 만든 실사영화는 처음이다. <립반윙클의 신부>를 만든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물론 원자력 발전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결국 내가 이 사회에 대해 지금 느끼는 것들이 작품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3•11 이전에도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뱀파이어>를 보면 알겠지만, 집단자살이 중요한 소재이고(<뱀파이어>는 자살 사이트의 여성들에게 접근해 피를 빨아먹는 뱀파이어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세상에 대한 내 시선이 그렇게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일본은 매년 3만명, 하루 평균 100명 정도가 자살을 한다. 그게 지금 일본 사회의 현실이다. 작품의 배경이 된 밴쿠버도 자살률이 높다고 알고 있고, 대부분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정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빈곤의 문제도 있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매우 아슬아슬한 삶을 살며 매일 불안과 싸우고 있다. 여기에 저출산, 고령화 문제까지 더해지니 상황이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재해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사는 게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이 사회가 이런 상태로 괜찮은지 의문이었고, 앞으로 어떤 과제가 있는지 이야기하고 싶었다. <립반윙클의 신부>의 여주인공이 겪는 우여곡절과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지금 이 사회가,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불안을 담고 싶었다.

-작품 구상은 2011년 후반으로 대지진 이후 시작했는데, 제작이 늦어졌다(영화에 앞서 이와이 슌지가 쓴 원작이 먼저 발간됐다). 촬영도 지난해 11월에 시작해 올해 7월에 끝났는데, 공식 홈페이지(www.iwaiff.com)에 ‘깨닫고 보니 작업이 늦어졌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고, 그사이 처음과 달라진 지점도 있는지.

=오래 손을 대면서 작품이 달라졌는지 아닌지,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 명확하게 구분하기가 쉽지 않지만 현재까지도 후반작업에 손을 대고 있는 상태다(이와이 슌지 감독은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이 작품의 밤샘 작업을 하느라 인터뷰 때는 몸살이 걸려 힘들어했다). 한국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돌아가면 다시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한다. 이 작품을 보면 무엇이 모자란지, 이대로 괜찮은지나 스스로 판단하기 힘들 정도로 신기하고 묘한 매력이 있다. ‘이렇게 해야 답이다’를 쉽게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게 잘 안 된다. 그래서 더 재밌기도 하고.

-작품의 프로듀서인 미야가와 도모유키가 여주인공을 두고 한 인터뷰에서 “현대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같은 히로인이다”라는 힌트를 주기도 했다. <립반윙클의 신부>는 SNS에서 쉽게 결혼 상대를 찾아 결혼한 후 남편의 외도로 파경을 맞는 여성이 결혼식의 가짜 하객 아르바이트, 비즈니스 호텔의 청소부 같은 일을 하며 겪는 곤란을 그리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조명하는 내용이다. 짐작건대 화이트 이와이(<러브레터> <4월 이야기> <하나와 앨리스>보다 블랙 이와이(<릴리 슈슈의 모든 것> <스왈로우테일 버터플라이> <언두> <피크닉>)에 더 가깝게 읽힌다.

=현대사회에 큰 의문을 품고 있었고 그걸 이번 영화의 소재로 착용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과연 무엇인지 이런 것들도 탐구해보고 싶었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작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영화를 완성하고 내년 2월 한국 개봉에 맞춰 다시 길게 이야기하고 싶다.

-형식적인 변화를 확연히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언두>(1994), <러브레터>, <4월 이야기>(1998),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 <하나와 앨리스>를 통해 ‘이와이 월드’의 영상을 구축해온 시노다 노보루 감독의 부고 이후 변화가 궁금했다. 이번 작품은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과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으로 호흡을 맞춘 간베지기 촬영감독이 맡았다. 아직까지는 예고편에 드러난 힌트가 전부인데 일본의 사계를 담고 자연광 사용에 중점을 두었다고.

=시노다 노보루 감독이 돌아가시고 나서 작업할 때 고생을 많이 했다. 기본적으로 조명의 사용은 내 스타일대로 하니 자연광을 많이 이용하는 스타일에 변화는 없다. 그런데 지금 함께 작업하고 있는 촬영감독은 아직 어리고 신인이라 경험이 부족해 나한테 많이 혼난다. 이번 작업 때는 그가 동료를 한명 더 데리고 왔는데, 정말 실력이 없어서 촬영감독의 역할이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더라. 차라리 내가 찍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였다.

<뱀파이어>

-그 정도라면 현장에서의 고충이 상당했을 텐데.

=원래 현장에서는 화를 내게 되지만, 이번 현장에서 특히 화를 많이 냈다. 나도 내 작품을 만들고 있지만 다른 분들도 자신의 작품을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와야 하는데, ‘이와이 슌지 현장 구경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오는 스탭들을 자주 보게 된다. 촬영에 있어서도 가끔 핸드 카메라로 촬영하는데, ‘이와이 슌지 감독 영화니 영상이 흔들려야 해’ 하고 흔들고 있다. 내 영화의 많은 장면들은 흔들어서 흔들리는 영상이 나오는 게 아니라 강한 의지를 가지고 집중해서 찍다보면 카메라가 흔들리고 그걸 담는 거다. 결과물을 보면 이런 고충을 모를 수 있지만 현장에서는 그만큼 힘이 들 수밖에 없다. 난 이게 단순히 내 현장에서의 일이 아니라 일본에서 영화를 찍다보면 겪는 문제라고 본다. 일본에서의 영화작업은 아마추어리즘과의 싸움이다. 일본은 인디영화가 많다보니 스탭들도 그만큼 젊다. 그만큼 오래 일하지 못하고 떠나고, 현장에 경험이 있는 노련한 스탭이 없다는 뜻도 된다. <뱀파이어>를 캐나다에서 찍고, <새 구두를 사야 해>(2012)로 파리에서 프로듀서로 해외스탭들과 일하다 오랜만에 일본에서 찍다보니 이런 지점이 절실하게 다가오더라. 일본은 TV드라마쪽이 훨씬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다. 젊은 스탭들을 가르치는 건 싫지 않지만 일이 진행되고 있는 현장에서 그런 시간을 가진다는 건 말도 안 된다.

-예고편으로만 미루어보건대 이번에도 ‘이와이 월드’를 상징하는 유려하고 감각적인 영상은 유효하다.

=물론 어떻게든 아름다운 영상은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영상만을 아름답게 찍기 위해 몰두하면 이야기가 살아나지 않는다. 이야기라 함은 배우의 연기고, 연기를 아름답게 표현해야 아름다운 영상이 나올 수 있다. 촬영은 좋은 배우만 모아놓으면 막상 촬영기간은 한달도 필요 없다. 현장에서 조명 세팅하고 그러느라 시간을 많이 쓰는데 나는 그런 게 거북스럽고 불편하다. <러브레터>는 촬영에 두달 걸렸는데 지금 찍는다면 한달이면 찍을 수 있을 것 같다. 대개 시간을 들이면 결과가 좋게 나온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생각하는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책을 쓰고 글을 쓰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고 본다. 한 영화를 만드는 데 3~4년의 시간이 걸려도 관객을 납득시킬 정도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후반작업에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나는 촬영보다 후반작업에 더 긴 시간을 할애한다. 내가 생각하는 촬영 기간은 책을 쓰는 시간과 후반작업 사이에 휴식하는 시간에 가깝다. 내가 할 일은 촬영 전에 미리 했었거나, 뒤에 하면 된다. 각본이 나 혼자의 작업이라면 현장은 여러 프로들이 와서 자기 할 일을 잘하면 된다. 그래서 지금까지 작품 만들면서 각본가의 일과 에디터의 일은 열심히 한 반면 가장 안한 것은 감독의 일이지 싶더라. 최근 그 깨달음을 얻었는데, 10년 후에는 감독 일도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싶었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서 앳된 모습의 아오이 유우가 지금은 어른으로 성장했다. 애니메이션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에서는 아오이 유우가 이제 중학생을 연기할 수 없어 목소리 캐스팅을 했다고도 했는데. 당신 작품의 한 시기를 상징했던 아오이 유우의 성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번 작품의 여주인공인 신예 구로키 하루는 지금 일본에서 ‘아오이 유우와 닮은’ 청순한 이미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데, 구로키 하루에 대한 기대지점과 호흡은 어땠나.

=아오이 유우는 본인도 연기에 대해 뭘 모르던 어린 시절 나와 작업을 했다. 최근에는 프로 감독과 많이 작업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오히려 나와 함께하는 걸 어려워한다. 나도 예전 영화로 다시 돌아갈 수 없듯이, 우리 관계 역시 그런 게 아닐까. 구로키 하루는 TV프로그램(<마이 리틀 영화제>라는 CM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이와이 슌지 감독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구로키 하루는 이후 <하나와 앨리스: 살인사건>에 목소리 출연을 하기도 했다)을 통해 발굴했는데 잠재력이 많은 배우다. 이번 작품도 구로키 하루와 할 수밖에 없는 기획이었다 할 정도로 능력이 많고 기대가 되는 배우다.

-“40대에는 미국을, 50대에는 중국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기사를 봤다. 얼마 전에는 중국 멜로영화 <연애중의 도시>의 프로듀서로 참가하기도 했는데,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나.

=최근 내가 가장 적극적으로 일을 펼치고 있는 무대가 중국이다. 그곳에 친구들도 많다. 일본에 살면서 해외로 진출해 작업하는 것과 그 나라에 가서 살면서 일하는 건 전혀 다르다. 그래서 일부러 얼마 전까지 미국에서 살면서 일한 것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작업에 참여하면서 촬영방법을 학습하고 싶다. 앞으로는 한국에서도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한국은 다른 나라와 영화 환경이 또 다르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현장에 흡연자가 많다는 말도 들었다(최근 이와이 슌지 감독은 담배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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