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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족이 된다
이화정 2015-12-24

<바닷마을 다이어리> 가족, 죽음, 관계의 순환에 대한 사려 깊은 질문

15년 전 집 나간 아버지에게서 온 부음을 통해 만나게 된 이복동생. 가마쿠라의 세 자매는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으로 갑자기 한가족이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네 자매에게 닥친 변화된 일상으로 들어가 그간 견지해온 가족, 죽음, 관계의 순환에 대해서 또 한번 질문한다. 아야세 하루카, 나가사와 마사미, 가호, 히로세 스즈가 들려주는 고레에다 감독과의 작업에 대한 기억도 함께 실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만큼 지독한 관찰자가 또 있을까. 그의 시선은 항상 누군가가 묻으려고 하는 기억에 가닿는다. 시간의 축적 속에 덮여 있었을 뿐 상실은 예나 지금이나 빈 공간으로 남아 메워지지 않으며, 상처는 감추고 싶은 흉터로 남아 있다. <환상의 빛>(1995)의 유미코는 5년이 지나 남의 아내가 되었음에도 문득 전남편이 자살한 이유를 찾아 나서야 했고, <걸어도 걸어도>(2008)의 가족들은 15년 전 물에 빠진 소년을 구하고 죽은 아들의 기억 속에서 함께 허우적거린다. 6년 동안 키운 아이가 병원에서 뒤바뀐 남의 아이인 걸 알게 된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의 료타는 이제 자신과 마찬가지로 힘겨웠을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고레에다 감독이 되돌아보고 묘사하는 과거의 비극에 ‘에누리’는 없다. 그의 영화 속 상당히 많은 장면이 밥을 먹는 것과 같은 일상적 상황에 할애되고 있으며, 최대한 배우들의 어투가 묻어난 자연스러운 대사만으로 진행되는 화법 때문에 그저 유순해 보인다는 착각이 들 뿐이다. 어느날 과거의 시간이 어떤 이유로 말을 걸어온다면, 다시 또 영화 속의 그 개인들은 묻어두었던 상처를 헤집어봐야 하고, 어떤 방식이 되었건 극복해야 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서른살 여성 사치(아야세 하루카)에게도 이 지독한 과정은 비켜가지 않는다. 딴살림을 차려 나가 소식이 끊긴 아버지. 멀리 야마가타에서 전해진 아버지의 부음과 함께 묻어두었던 과거의 상처들이 한꺼번에 밀려온다. 그건 아버지와 떨어져 산 15년의 세월을 다시 힘겹게 복기해야 하는 일이다. 그사이 떠난 남편을 탓하며 아이들을 건사하기 버거워진 엄마는 집을 나갔고, 사치는 할머니와 함께, 동생 요시노(나가사와 마사미)와 치카(가호)의 보호자 역할을 떠맡아야 했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기를 강요받은 그녀의 얼굴에는 꼭 집 나간 엄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봐야 했던 <아무도 모른다>(2004)의 12살 소년 아키라의 모습이 데칼코마니처럼 어른거린다.

자매들의 인생에 갑자기 개입한 이복동생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사치와 함께 중심축을 이루는 인물은 자매들의 인생에 갑자기 개입한 13살 이복동생 스즈(히로세 스즈)다. 그녀는 ‘자신의 존재만으로 누군가는 상처받는다’는 걸 아는, 사치처럼 ‘속이 깊은’ 아이다. 이 지점에서 스즈를 연기한 히로세 스즈의 표정이 주는 감흥이 상당히 큰데 이 배우는 내내 주눅 들고 근심이 가득하다가도, 웃을 때는 더없이 어린아이같이 해맑은 미소를 내어줄 줄 안다. 사치가 내키지 않는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찾아가 그곳에서 만난 스즈의 표정을 통해 발견한 건, 바로 힘겹게 지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다. 친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빠가 재혼을 했고, 그렇게 새어머니와 살며 무책임한 새어머니 대신 병든 아버지를 간호했던 스즈의 힘겨움을 미루어 짐작한 사치는 스즈에게 선뜻 “우리랑 같이 살래?” 하고 제안한다. 이제 어른이 된 사치의 행동은 “어른들이 할 일”을 대신하며 고통을 겪었던 15년 전 과거의 자신을 구출하려는 치유의 과정과도 같아 사뭇 뭉클해지는 지점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불륜으로 인연이 된 자매들은 가마쿠라의 낡은 전통가옥에서 함께 살아간다. 어찌 보면 여느 막장드라마에서나 볼 정도로 지독하기 짝이 없는 시작이다. 하지만 자매들은 만남 이후의 시간을 아버지를 ‘뺏어간’ 이복동생 스즈에 대한 미움을 키우는 대신, 그녀의 성장을 지켜보는 데 할애한다. 긴 겨울이 지나고 자매들은 바닷가로 함께 놀러가고, 여름 하나비(불꽃놀이축제) 때는 마당에서 유카타를 입고 함께 폭죽놀이를 한다. 목욕탕에서 징그러운 벌레 꼽등이가 출몰해 법석을 떠는 것도, 요시노가 스즈에게 페디큐어를 발라주는 것도 모두 여자들만 사는 집, 자매들의 흔한 일상이 된다. 잔멸치 덮밥, 생선 카레, 찹쌀떡, 금방 삶은 국수 같은 음식은 자매 중 누구에게는 헤어진 아버지와의 기억이고, 또 누구에게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어머니와의 기억이기도 하다. 이제 그 기억에 더해, 매년 여름이 되면 매실이 풍성하게 열려서 그 매실을 수확해서 매실주를 담가 먹는 자매들은 그 전통을 스즈에게도 전수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기억의 맛을 쌓아 올린다. 매실주에 취해서야 비로소 “새엄마 제일 싫어”, “아빠 바보” 하고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는 막내 스즈를 지켜보는 언니들은 그제야 스즈의 ‘언니’에 한발 더 다가서게 된다. 매년 세 자매들의 키를 표시해둔 마루의 나무 기둥에는 이제 막내동생 스즈의 키도 새겨지게 되고, 자매들이 함께 지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그렇게 순환하고 축적된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소중한 ‘쿠나’

스즈와 세 언니들은 어쩌면 자매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작’의 단서를 제공한 건 너무 어려서 기억을 하지 못한 동생들의 몫까지 사치가 애증했던 죽은 아버지였다.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 속에서 죽음은 늘 숨결처럼 다가오지만, 그 죽음은 섣불리 어둠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불행은 존재하지만, 그 불행을 야기한 악인의 존재는 규정하기 힘들다. ‘스기노 아이 유기 사건’ 같은 끔찍한 실화를 모티브로 한 <아무도 모른다> 같은 자극적인 설정 속에서조차 고레에다 감독은 쉽게 이 불행을 짐 지우고 원망할 대상을 찾지 못하게끔 단단한 장치를 해두었었다. 어쩌면 손가락질을 당해야 마땅할 아이들의 엄마는 집을 나가기 전 아이들과 나란히 누운 잠자리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못 봤으면 모를까 그 짧은 장면이 자꾸 신경 쓰일 수밖에 없어진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도 마찬가지다. 간호사 사치는 같은 병원에서 근무하는 유부남과 비밀연애를 하고 있는데, 스즈는 그런 언니의 연애를 보면서 자신을 평생 비난의 대상으로 남겨둔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사치가 스즈를 감싸안듯이, 스즈는 이제 죽은 엄마를 반추하는 것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조명한 자극적인 설정들이 한낱 ‘이야깃거리’로 소비되지 않는 이유도 바로 이 관계의 이해에 바탕한다. 최근 발간된 고레에다 감독의 산문집 <걷는 듯 천천히>를 참고하자면, 이렇게 작품 속에 악인을 설정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에 그는 “누군가를 ‘악인’으로 설정하는 것이 이야기(세계)는 알기 쉬워질지 모르지만, 반대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관객이 이 영화를 자신의 문제로 일상에까지 끌고 들어가도록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고레에다 감독이 2012년에 만든 TV드라마 <고잉 마이 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숲의 요정 쿠나가 등장한다. 아버지가 쓰러져 고향 나가노에 간 TV프로듀서 료타(아베 히로시)는 그곳에서 아버지가 애써 찾던 쿠나를 알게 되고 자신도 그들을 찾아 나서는 (꽤나 심심한) 이야기가 (기적처럼) 방송으로 제작되었다. 어쨌든 료타는 쿠나를 찾는 과정에서 바삐 지내느라 소원했던 아버지의 존재를 되새긴다. 돌이켜보면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이 쿠나를 찾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시간의 흐름 속, 너무 작기 때문에 애써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그 기억과 관계에 고레에다 감독은 특유의 감식안으로 접근해 나간다. 가마쿠라에 와서 성장기를 겪는 스즈와 바닷마을 자매들에게 우리가 흔히 규정하는 ‘혈연’이란, ‘가족’이란 의미는 무엇일까? 정상적이라 부르는 관계를 벗어나서도 그렇게 가족이 된 네 자매의 일상 속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소중한 쿠나가 숨 쉬고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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