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잔해는 빗자루에 쓸려 납골함에 담겼다. 뼛가루가 스민 공기에 불쾌한 냄새가 스몄다. 이딴 곳, 아우성을 뒤로하고 납골함을 든 채 터벅터벅 걸어나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딴 곳에서 인간의 소멸을 받아들이라는 것은 순전히 억지다. 친척들과 선산 앞 동네로 나와서 나주곰탕을 먹었다. 국물에서 화장터 냄새가 나네. 젊은 사촌들은 내 말에 조용히 웃었다.
친구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발을 헛디뎌서 죽었다. 죽기 한달 전에 그를 만났다. 지하철 플랫폼에나란히 서서 대화를 나눴다. 그는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했고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나보다는 그가 유리했다. 그는 벌써 개성적인 촬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고 내 글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내가 쓰고 네가 찍어서 하나 만들어보자. 죽여주는 작품을!” 그래, 하면서 그는 피식 웃었고 나는 그 바람 새는 웃음에 모욕감을 살짝 느꼈다. 무표정한 얼굴과 무채색의 상복. 그의 장례식에서 나는 생각을 그만두자고 생각하면서 생각해나갔다. 대체 상복이 색깔을 가지면 왜 안 된다는 말인가. 죽음을 향한 마땅한 합의가 이뤄진 까닭일까? 죽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개성 없는 일이어야 한다는? 그의 동료들이 감독이 됐고 올해 나는 각본상 두개를 받았다. 그는 여전히 죽어 있다.
몇달 전 자정, 대학 후배에게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다. 십년 넘게 알고 지내면서도 깊게 대화를 나눈 적이 거의 없었는데, 최근에 교류가 많아진 친구였다. 만취해서 혀 꼬인 소리로 서울 반대편의 술자리에 나를 불러냈다. 함께 취한 친구들이 내 얼굴 좀 보자고 꼬드기고 있었다. 자다 말고 받은 전화였다. 야, 이런 전화는 열시 이전에 걸라고! 농담조로 말하고 끊었다. 장례식장 뒤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그때 민영이가 손 작가님이랑 친하다고 자랑하려고 전화 걸었는데 많이 민망해했어요. 아직 덜 친한데 너무 들이댔나봐, 하면서….”
후배의 장례식장에서 내내 벽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울지는 않았다. 십년 넘게 장례식장에서 울어보지 못했다. 여자친구가 왜 울지 않는지, 왜 그렇게 강한 척을 하는지 다그쳤다. 눈물이 안 나와. 그뿐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고민해본 적은 있다. ‘다들 모르는 건가? 아님 모른 척하는 건가? 슬픔은 죽음 때문이 아니라, 삶과 죽음의 현격한 차이 때문이야. 종교가 미신이라면, 사후 세계가 미신이라면, 마찬가지로 죽음에 헌정되는 비애도 미신이다. 죽음에 할당된 감정은 없어. 우리는 살아 있는 각자의 감정을 위해 우는 거다.’
집에 돌아오니 극심한 피로가 느껴졌다. 내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서 적어도 나만큼은. 이 글은 오직 작고한 사회진보연대 송민영씨를 위해 썼다. 더 친한 사람은 많았지만 한 사람을 위해 쓰는 글은 처음이다. 사실 그녀를 위해서인지 내 기억의 약한 틈을 땜질하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 살아 있는 존재는 너무 이기적이라고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