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포스티노>(1994)에서 대시인 파블로 네루다(필립 누아레)가 망명생활을 위해 이탈리아의 한 작은 마을로 오게 된다(원작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의 무대인 칠레를 이탈리아로 옮겼다). 모든 인민이 사랑하는 위대한 시인이자 사회주의자인 그가 오면서 마을은 들썩거린다. 그에게 편지를 전해줄 우체부를 고용한다는 말을 들은 마리오(마시모 트로이시)는, 마을 여자들이 흠뻑 빠져 있는 그가 도대체 누군가 싶어 담당 우체부가 됨과 동시에 처음으로 작품을 찾아 읽어본다. “난 시들고 멍한 느낌으로 영화 구경을 가고 양복점에 들른다. 독선과 주장의 틈바구니에서 시달리고 있는 덩치만 큰 백조처럼 이발소에서 담배를 피우며 피투성이 살인을 외친다. 인간으로 살기도 힘들다.”
우편배달부는 그 마지막 문장에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깊은 인상을 받는다. 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많았지만 도저히 뭐라 표현할 수 없었던 그 기분을 ‘인간으로 살기도 힘들다’라고 표현한 마지막 시구에서 전율을 느꼈던 것이다. 그때부터 마리오는 여자들이 좋아하는 시인이 되기 위해 시를 가르쳐 달라고 한다. “‘하늘이 운다’가 뭐지?” “비가 오는 거죠.” “그래, 그게 바로 은유야.” 그렇게 대시인과 우체부는 조금씩 교감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단지 시와 문학에 대한 경외로만 끝났으면 섭섭했겠지만, 영화는 ‘시청각’의 힘도 보여준다. 칠레로 떠난 네루다에게 마리오는 편지가 아니라 그 마을의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려주기 위해 파도 소리, 성당의 종소리 등을 녹음하여 테이프에 담아준 것이다. 아마도 요즘이라면 동영상에 담겼을 법한 콘텐츠들이다.
<일 포스티노>를 통해 ‘문학’ 얘기를 꺼낸 이유는, 이번호에서 해마다 가을이면 진행했던 ‘책 특집’의 또 다른 버전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네루다와 우체부 사이의 교차로가 되고 싶은 마음이랄까. 아무튼 이번호 특집은 한국의 주목할 만한 젊은 소설가들에 대한 것이다. 얼마 전 만난 한 제작자가 ‘요즘 기억해두면 좋을 한국 소설가가 누가 있는지’ 물어봤던 것에 대한 답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 우리 또한 궁금했던 터였다. 10명의 소설가 중 이미 시나리오 작업 중이거나, 영화화 판권 계약 중인 이들도 꽤 있다.
무엇보다 천명관, 김영하, 김연수 등 <씨네21> 독자라면 익숙할 법한 이름들이 아니라 이왕이면 새로운 이름들로 채워보려 했다. 곽재식, 구병모, 김태용, 손보미, 송시우, 장강명, 정지돈, 조해진, 최민석, 한유주. 한번 더 호명해본다. 여건상 함께하지 못한 소설가도, 혹은 우리가 더 찾아내지 못한 소설가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독서의 계절을 지나 이미 12월이다. 또 가구당 월평균 도서구입비가 1만5천원 미만으로 떨어져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래저래 쓸쓸한 연말이지만, 단편이건 장편이건 저마다 치열한 경쟁 끝에 ‘올해의 한국소설’ 하나쯤 갖고 있으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