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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 정만식, 김상호, 정석원, 성유빈] 한바탕 잘 놀다 갑니다
장영엽 사진 오계옥 2015-12-07

<대호> 배우들의 대화

<씨네21>_영화를 못 보고 인터뷰를 해서 아쉽다.

정만식_호랑이가 아직 연기를 다 끝내지 못해서….(<대호>의 CG 캐릭터인 호랑이는 후반작업 중이다.-편집자)

최민식_호랑이 걔, 소속사가 어디야?

정석원_사나이픽처스 아닙니까?

최민식_사나이에서 이번에 키우는 신인배우지? 아니, 신인이 선배들 와서 인터뷰하는데 인사도 안 하고 말이야. (좌중 폭소) 본 촬영 때는 나타나지도 않고. 예의가 없어.

김상호_(인터뷰 자리에 뒤늦게 합류하며) 죄송합니다.

최민식_아니, 너 말고 호랑이 말이야. (좌중 폭소) 우리 본 촬영 때도 주연배우들을 가이다마(카메라와 조명 세팅을 위한 대역배우)시키고. 아, 정말…. (웃음)

<씨네21>_워낙 많은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들이라 한번쯤은 협업을 했을 법도 한데, 다섯 배우 모두 함께 연기한 적이 없다.

정만식_그래서 흥분됐다. 최 선배님도 그렇고 상호 형도 그렇고, 술 먹을 때만 봬서…. (웃음)

최민식_우리가 술집에서는 많이 봤는데.

김상호_사나이픽처스 사무실에 가서 (최민식) 선배님께 인사드리니 “상호야! 언젠가는 만날 줄 알았는데 이제 만났다, 우리. 반갑다”고 하시더라.

최민식_같이 있는 자리에서 이런 얘기 하기 낯간지럽지만, 다들 꼭 한번 같이 해보고 싶은데 연이 안 닿았던 배우들이었기에 <대호>에서 함께하게 되어 아주 좋았다. 상호는 제작진이 칠구 역할로 일찌감치 염두에 둔 배우다. 구경 역할은 대본을 보자마자 만식이가 떠오르더라.

정만식_사실 <대호> 이전에 다른 영화를 하려고 했는데 잘 안 됐다. 쉬고 있는데 연락이 왔고, 어떻게 보면 내 인생의 가장 큰 대어를 만나게 된 거다. 그런데 <대호>가 공교롭게도 출연하지 못하게 된 영화와 같은 날 개봉을 한다. 그게 <히말라야>다.

김상호_그래서 네가 그렇게 열심히 잘했구나.

정만식_환장하고 했지. (웃음)

최민식_거 안 하길 잘한 거야. 거기 (산에) 올라가봤자 뭐 있냐. (웃음)

정만식_그런데 <대호>에 출연하고 시나리오를 본 뒤에는, 뭐랄까,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최 선배님과도 붙어야 하고, 상호 형도 만난 지가 10년이 되어가는데. 게다가 비중이 큰 인물이었고. 하지만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다.

김상호_<히말라야> 때문에? 으하하.

정만식_사나이픽처스와의 의리도 있고, 아름답게 해결을 하고 싶었다.

김상호_나는 정말 죄송하지만, <대호>에 출연하기 전에 약속이 되어 있는 작품이 있었다. 그 작품의 감독님을 만나서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대호>가 온 거다. 대본을 탁 덮고 ‘아이고, 이거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스케줄상 두 작품 모두 할 수는 없었거든. 그쪽 작품 감독님께 전화를 했다. ‘감독님, 제가 지금 너무 가슴 떨리는 대본이 하나 들어왔는데…. 제가 아무래도 그쪽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일주일 뒤에 감독님에게 문자가 왔다. <님의 침묵>이란 긴 시를 써서 보내셨더라. 죄송하긴 하다. <대호>가 좋은 평가를 받으면 이해를 해주시겠지. 하여튼 나는 그런 배신이 있었다.

최민식_배신은 아니지. 인연 따라 가는 거지.

김상호_읽고 나면 머릿속에 무언가가 그려지는 대본이 있다. <대호>는 그런 대본이었다. 눈바람이 쉭 부는데 호랑이가 스윽 지나가고, 대본에서 겨울 냄새 같은 게 나더라.

정석원_나는 <대호>라는 시나리오가 돌고 있다는 얘길 들었다. 매니저들끼리 우연히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정말 궁금하더라. 내가 워낙 최민식 선배님 팬이라 선배님께서 하신다는 강연을 서서라도 보겠다는 생각에 불시에 찾아갔었는데, 선배님이 ‘<대호> 시나리오 받았지? 잘해라’라고 하시더라. 나중에 보니 회사로 시나리오가 와 있었다. 나는 하고 말고 그런 것도 없었다. 너무 좋은 기회가 찾아왔으니까.

성유빈_나는 오디션을 봐서 참여하게 됐다. 3차까지 오디션을 봤는데 마지막 3차에서는 최민식 선배님도 뵈었다. 오디션을 본 뒤에 엄마가 말씀해주셨다. 시나리오를 읽고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나는 무조건 한다고 했다.

최민식_내가 들었던 얘기랑 조금 다른데? 넌 모를 거야. 어머님이 사나이픽쳐스 화장실 변기 다 바꿔주셨어. (좌중 폭소) 미안하다. 농담이다. 유빈이와 대사를 맞춰보는데 연기를 안 해서 참 좋았다. 어린 친구들이 열심히 한다고 연기를 하는데, 그게 작위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거든. 그런데 이 친구는 대사를 내추럴하게 하는데 그게 참 좋았다. 애들처럼 보이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아주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어린아이에서 조금 영글어가는, 또래 여자 아이인 선이에게 칠렐레 팔렐레 하는, 석이의 그 순수함이 유빈이에게서 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렇고 감독도 그렇고 아, 저 친구랑 해야겠다 생각을 했지.

정만식_현장에서도 나이에 맞지 않게 연기를 대강 하더라. 그게 좋은 거다. 그게 순수한 거지.

최민식_배우로서 <대호>는 새로운 시도였다. 모든 관객이 호랑이가 CG라는 걸 알고 있고, 그것이 기술적으로 얼마나 잘 구현되었는지 주목할 텐데 배우로서는 다른 극영화에 비해 기술적인 부분이 중요한 영화라는 점이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배우의 연기가 기술을 뒷받침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봤다. 그래서 일단 질러놓고 본 건데. 사실 우리도 결과가 궁금하다.

도를 깨우친 사람들

<씨네21>_<대호>의 포수들은 어떤 면에서 도를 깨우친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불은 일단 댕기면 업이 따른다’는 신조, ‘잡을 놈만 잡는 것이 산에 대한 예의’라는 대사로부터 느껴지는 어떤 직업적인 성스러움이 있다. 이제까지 한국영화에서 제대로 표현된 적이 없는 포수의 정체성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나.

김상호_내가 맡은 칠구라는 인물은 두분(최민식, 정만식)이 연기하는 포수와는 다른 삶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색깔이 없는 ‘무색’의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고, 이리 가라면 이리 가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삶의 색채가 아닌가 싶다. 칠구는 류(정석원)와 구경(정만식)의 밑에서 일하며 월급을 받고 살아가는 포수다. 자기 마음가는 대로 한다면 동물을 적당히 살려뒀을 테지만 명령에 따라 살아가는 인물이기에 다 죽여야 한다. 그렇게 무색무취하면서도 자기의 공간감이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칠구의 매력이다.

정만식_구경에게는 삶의 목표가 그냥 ‘대호’를 잡는 것이다. 10살 무렵부터 형님들을 따라다니며 몸으로 살생을 체화한 인물이기에 민첩해야 했고 그래서 이 작품을 준비하며 살도 빼야 했다. 호랑이를 마주했을 때의 순간을 표현해내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호랑이의 눈, 발, 몸집 등을 기록한 영상을 휴대전화에 저장해서 자주 보며 그 감각을 익히려 했다. 그리고 포수대들이 웃고 떠들 때도 구경은 멍하니 있는 사람이다. 대호를 반드시 잡아야 하고 잡고 싶은 사람이다보니 그 의지가 계속 마음속에서 들끓고 있는 거지. 고요함 속에서 매서움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이번 현장에서는 따로 앉아서 겉돌기도 하고, 혼자 멍하게 있는 시간이 좀 많았다. 다른 현장에서보다 말수가 좀 줄었던 것 같다.

최민식_내가 가장 염두에 뒀던 건 생활인으로서의 사냥꾼이다. 그동안 이 사람들이 사냥을 하며 밥을 먹고 살았다는 게 한방에 보여야 한다. 그건 감독이 디렉션을 준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뽀송뽀송한 피부에 메이크업을 한다고 해서 보여지는 게 아니거든. 관록이 있는, 굳은살 박인 배우들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선배로 동료로 상호와 만식이와 함께 작업하면서 감탄해 마지않고, 흐뭇하고, 진짜 사랑스럽다는 표현까지 쓰고 싶었다. 왜냐하면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순간 이 배우들은 정말 수십년 포수질해먹고 산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 벌써 끝난 거다.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배우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수십년을 포수질해서 먹고산 그 생활인으로서의 모습은 배우들이 자기 삶의 무게로 보여줘야 하는 것이거든. 기대했던 것의 200, 300%를 해내는 배우들이니 더없이 좋았다.… 오늘 뻐꾸기 괜찮았다, 누가 밥 사라. (좌중 폭소)

<씨네21>_석원씨는 일본군 장교 역할을 맡았기에 야외보다는 세트 촬영이 많았겠다.

정석원_맞다. 선배님들께는 너무 죄송하지만 세트 촬영이 많았다. 야외에 나간 장면이 그리 많지 않다. 한번쯤 야외에서 촬영하며 추울 때가 있었는데, 그때 춥다고 얘기했다가 혼났다.

최민식_석원이는 현장에서 3보 이상이면 차에 탄다. (웃음) 장교라서.

정석원_한번은 일본 고관 마에조노 역을 맡은 오스기 렌이 일본으로 돌아가야겠다고 할 정도로 추웠다. 나도 어지러울 정도였는데 선배님들은 그 이상의 날씨에서 계속 촬영을 하셨으니….

정만식_이분들(최민식, 김상호)은 산을 기어가셨어. (웃음) 거기다가 강풍기까지 틀었으니.

최민식_일본이나 홍콩 배우들이 우리나라에서 겨울에 촬영하면 죽으려고 한다. 다신 안 오겠다고 한다더라. 칼바람이 부니까.

<씨네21>_일본 배우 오스기 렌과 촬영한 장면이 많은데, 소통은 어떻게 했나.

정석원_통역사도 있었지만 서로 보디랭귀지를 하려 애를 많이 썼다. 오스기 렌도 한국말을 배워서 쓰려하고. 그렇게 안 보이는 소통이 좀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몇살이냐고 묻고선 나이를 듣고나서 자기 아들이랑 동갑이라고 하더라. 아버지와 동갑인 52년생이라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 자기를 ‘파파’라고 불러달라고 할 정도로 위트가 있으셨다.

<씨네21>_현장에서 최민식 선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최민식_그런 생각을 했다. 같이 작업하는 것도 인연이고 일단 영화에 합류했으면 반드시 본인이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내가 자극을 조금 준 거다. 물론 석원이가 그동안 드라마에도 출연했고 영화 작업도 했지만, 한번 제대로 부딪혀서 힘든 걸 겪어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정석원_다양한 작품을 하면서 많은 선배님들을 뵈었지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 진심으로 혼내거나 알려준 선배님은 드물었다. 그런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해서 그런지 매일 그런 것들을 고파했다. 지난 8년간 현장에서 눈치만 보고 주눅들어 있는 모습이 있었는데 선배님께서 진심으로 자극을 주시고 알려주시고 깨닫고 느끼게 해주셨다. 그것에 대한 감사함이 크다.

정만식_석원이가 자기 분량이 없을 때에도 자주 현장을 찾아왔었다. 선배들 연기를 보려고 하고. 자기 노력도 굉장히 컸다.

정석원_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를 현장에서 계속 생각했던 것 같다. 선배님들의 연기를 직접 뒤에서 볼 수 있다는 거 말이다.

현장의 삼촌들과 유빈이

<씨네21>_유빈군은 현장에 올 때 어머니가 아니라 최민식 선배와 동행했다고.

최민식_이건 지금에서야 밝히는 건데, 유빈이 어머니가 현장에 오시지 않았으면 하고 말씀드렸다. 어머님이 계시는 게 부담스럽고 싫어서가 아니라, 유빈이가 앞으로 배우를 해나가려면 독립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탭과 삼촌들, 아버지(최민식의 극중 역할)와 현장에서 함께 부비고 섞이는 걸 배워야 하거든. 지금은 열여섯살이지만 당시에 열다섯살이었는데, ‘엄마, 나 촬영 어땠어?’라고 물어보는 것과 자기가 직접 모니터를 보고 감독의 디렉션을 듣는 건 엄연히 다르다. 자꾸 의타심이 생기면 안 된다. 혼자라는 생각이 중요하다. 의지하려고 해도 현장에 있는 삼촌, 형들에게 의지를 해야지, 촬영 끝나고 집에 가면 엄마 아들로 애교를 부릴 수 있겠지만 현장에서는 유빈이도 엄연한 직업배우니까.

정만식_은근히 유빈이가 스탭 누나들과 잘 지냈다. 사랑을 엄청 받았다.

최민식_나는 내심 아부지에게 의지하겠구나 했는데, 스탭 누나들을 되게 좋아하더라고. 이 녀석이. 허허.

성유빈_조금 있으면 고등학생이 되고 머지않아 성인이 될 텐데, 언젠가는 정말로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 할 상황이 오니까. (최민식) 선생님 말씀이 맞다고 생각했다.

<씨네21>_영화에서 최민식 선배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많다.

성유빈_대사를 자주 보고, 입에 붙을 때까지 연습했다. 사투리라서 그런가, 원래 말투가 차분하긴 한데 사투리를 쓰니 말투가 더 느려지더라. 그래서 선생님이 얘는 왜 이렇게 노인네 같냐고도 말씀하셨다. (웃음)

<씨네21>_연습할 때와 실제로 최민식 선배와 합을 맞춰볼 때는 어떻게 다른가.

성유빈_많이 바뀐다. 현장에서 선생님과 연기하면 없던 것도 많이 추가되고 캐릭터에 대해 생각했던 느낌도 달라진다. 최대한 편하게 연기하려 했고 그게 중요했던 것 같다.

최민식_한편으로는 반성도 한다. 유빈이를 좀더 지켜보는 여유가 있었어야 했는데, 내가 생각하는 석이의 모습을 유빈이에게 너무 강요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친구는 그런 게 있더라. 순발력이 빠르고 모드 전환이 빠른 친구가 있는 반면, 유빈이는 인물을 체화하기까지 시간이 다소 걸리지만 일단 표현을 하기 시작하면 무척 깊이가 있다. 그런 장점이 있는 친구다.

성유빈_선생님과 감독님의 말씀도 들어보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더라. 스스로 생각해온 게 있긴 한데 말씀을 들어보면 이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또 막상 말씀대로 하면 잘 안 되고. 그래서 확신이 잘 안 섰다. 영화를 찍고 나서도 집에 가면 계속 ‘잘 나왔을까’ 생각하게 되더라.

김상호_다 그래. 나도 그렇고 만식이도 그렇고. 찍고 나서 집에 가면, ‘내가 오늘 뭐하고 왔나…’ 이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술을 마시는 거지. (웃음) 그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최민식_여보세요. 막걸리가 불러서 마시는 게 아니고? (좌중 폭소)

상상 속의 호랑이

<씨네21>_배우들 각자 호랑이와 맞붙는 장면이 많다. 물론 호랑이 대역을 맡은 배우가 있지만, CG 캐릭터가 대신할 자리를 상상하며 연기하는 경험은 어땠나.

최민식_우리의 시선을 잡아주는 배우가 있었는데, 곽진석이라는 친구가 아주 헌신적으로 잘해줬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연기까지 다 해주고. 누가 시켜서 한다기보다 본인 스스로 의식을 가지고 해주는 게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배우로서는 연기하기가 참 막막했다. 대호나 영화에 등장하는 새끼 호랑이들은 우리가 상상하면서 연기해야 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럴 바엔 속된 말로 상상을 즐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컷’ 소리가 나면 배우들도 풀어지듯이, 상상 속의 호랑이도 ‘컷’ 하면 저쪽에 가서 물을 마실 것 같은 느낌을 상상했다. 처음에는 머릿속으로 그런 상상을 하는 게 이상했는데, 회차를 거듭할수록 오히려 편해졌다.

정만식_작은 호랑이는 그 친구(곽진석)가 연기를 해주는데, 큰 호랑이는 긴 장대에 점을 찍어놓고 그걸로 시선 이동을 한다. 최 선배님이 말씀하신 대로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해서 연기했다. 어차피 연기 자체가 상상력과의 투쟁이니까.

최민식_우리 포수대가 연기하는 장면을 보면서 감탄했던 게, 호랑이를 산에서 조우하는 건 늑대나 이리 같은 산짐승을 만나는 것보다 흔한 경험이 아니다. 아무리 인간 세상에서는 억세기로 한칼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과연 호랑이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돌아가신 외할머니께 그런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집에서 도사견같이 큰 개를 키웠는데, 며칠 동안 밥도 안 먹고 툇마루 아래 들어가 시름시름하다가 어느 날 새벽 사라졌다고 하더라. 호랑이가 민가에 내려와 피해를 주고 할 때라 호랑이가 물고 갔을 거라고 하시더라. ‘호환’이라는 말이 있잖나. 그렇게 호랑이와 눈만 마주쳐도 시름시름 앓는다고 하는데, 현장에 블루마크만 있는데도 침을 꿀떡 삼키는 공포. 그런 디테일한 연기를 해내는데 너무 좋았다.

김상호_예전에 소련 사냥꾼이 조선에 와서 감탄을 하고 갔다는 글을 읽었다. 그들이 사냥하러 와서 우리 포수들이 쓰는 총을 보는데, 총이 형편없었다더라. 한 방을 쏘고 두 번째 쏠 때 장전 시간이 필요한 화승총이었던 거지. 그런데 기가 차게 쏘더라는 거다. 호랑이가 달려들 때, 단 한방에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 그런 상황인 거지. <대호>를 준비하며 봤던 자료 중에 그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6개월 동안의 기억들

<씨네21>_<대호>와 함께한 6개월은 서로에게 어떤 의미로 기억될까.

정만식_이 작품을 할 때 회사에 다른 책을 주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대호>가 끝남과 동시에 4개월 동안 일이 없더라. 하하. 몇 개월 바짝 힘들었지만 6개월간 한 작품에 매진했다는 게 지나고 보면 후련하고 시원한 기분이 든다. 내가 언제 한번 이렇게 열중해서 연기를 해봤었나 하는 생각이 들고, 또 하나는 신혼이었는데, 아이를 가질 타이밍을 <대호>를 하며 자꾸 놓쳤다. 병원에서 정해준 좋은 날짜도 있었는데, 자꾸 촬영 스케줄과 겹쳐서. (웃음) 맡은 캐릭터 때문인지 몰라도 집에서 말수도 줄고 말다툼도 몇번 있었다. 그런데 쫑파티 때 촬영현장 스틸컷을 보며 집사람이 수고 많았고 고생했다, 미안하다고 하더라. 나 스스로에게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은 기억이다.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최민식_백문이 불여일견이야. 원래 집안식구들이 현장을 잘 모르잖나. 그러면 약간 오해할 수도 있고 뭐가 그렇게 힘드냐 할 수도 있지만, 현장에 딱 하루만 데리고 오면 그다음부터 달라진다.

성유빈_많이 배우고 간다. 정말 제대로 영화 한 작품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까지 현장 자체로부터 배우는 건 있었지만, 다른 배우분들, 선배님들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배움을 많이 얻은 건 <대호> 현장이 처음이다.

최민식_카메라 앞에 서서 연기하고 술 마시고 밥을 먹고 피곤해서 쓰러져 자고. 늘 하는 일이지만 할 때마다 다르다. 예전에는 ‘아, 또 한 작품 털었다. 잘되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지금은 작품을 끝낼 때 애잔한 마음이 든다. 이게 갱년기인가. (좌중 웃음) 우리가 이렇게 다 모여서 어떤 주제를 가지고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악다구니처럼 일하는 과정이 굉장히 소중하고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거다. 영화 현장에서 각 파트의 장이 말하는 것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성실하게 해내는 스탭들의 앙상블을, 내 분량을 마치고 똑 떨어져서 지켜볼 때마다 참 대단하다, 뿌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노력을 스스로도 인정하고 싶고 좋은 결과로 대중과 소통했으면 좋겠다.

김상호_한바탕 잘 놀고 간다. 정말 신나게, 마음 편하게, 행복하게 잘 논 것 같다. 내 바람은 아이들이 컸을 때 <대호>를 보고 우리 아버지가 이런 영화를 찍었구나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작품이었으면 하는 거다.

최민식_아들한테 1인2역했다고 해. 호랑이 연기도 사실 내가 탈 쓰고 한 거라고. (좌중 폭소)

김상호_다음 인터뷰 때는 꼭 그렇게 말하겠다. (웃음)

성유빈_나에겐 <대호>가 연기자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계속 현장에 나가고 선배님들을 따라다니며 조언을 얻고, 함께하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스탭 이름을 외우게 되고, 이렇게 접근했던 작품은 처음이었다. 그러다보니 느끼는 것, 얻어가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다.

<대호>의 여섯 캐릭터를 소개합니다

천만덕(최민식)

소싯적 조선 최고의 명포수였으나 어떤 사건을 계기로 총을 놓았다. 지리산에서 약초를 캐서 먹고사는 그에게는 아들 석이가 세계의 전부다. 지리산의 산군이라 불리는 ‘대호’와 질긴 인연이 있다.

구경(정만식)

일본 고관 마에조노의 명으로 대호 사냥을 추진하는 조선 포수대의 리더. 삶의 목표가 오직 대호를 잡는 데 있는 인물이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만덕을 대호 사냥에 끌어들이려 한다.

칠구(김상호)

조선 포수대의 일원. 구경과 만덕의 속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다. 구경과 함께 대호 사냥에 나서지만 마음이 영 편치 않다.

석(성유빈)

만덕의 하나뿐인 아들. 한때 조선 최고의 명포수였다던 아버지가 약초나 캐고 다니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칠구의 딸 선이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

류(정석원)

일본군 장교가 되었지만 조선인이라는 뿌리가 늘 그에게는 콤플렉스다. 자신의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대호 사냥에 집착한다. 구경과 더불어 만덕을 대호 사냥에 이용하려 한다.

대호

조선 호랑이의 왕, 지리산의 산군으로 불리는 경외의 대상. 일제에 의해 토벌 대상이 된다. 궁지에 몰려도 자신의 영역을 사수하는 고고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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