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녀 아이사와 리쿠는 마음먹은 대로 눈물을 흘릴 수 있다. 열네살. 예쁘면서 독특한 분위기. 완벽한 주부인 엄마와 잘생긴 아빠가 있다. 남자 선생님들은 그녀에게 남몰래 전화번호를 주곤 한다. 어려울 거라고는 없다. 아, 여기가 눈물 흘릴 타이밍이네. 그런 생각이 들면 아이사와 리쿠는 머릿속 수도꼭지를 살짝 돌려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감정 상태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한다. 어른들의 사정이라는 것도 그녀에게는 손바닥 안처럼 쉽게 들여다보인다. 예컨대 리쿠의 아빠는 바람을 피우고 있다. 바람피우는 상대는 아빠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의 젊은 여직원. 아빠의 애인이 회식을 이유로 집에 온 날, 리쿠는 눈물을 흘린다. 엄마가 (말로 한 적은 없지만) 그것을 원하니까.
<아이사와 리쿠> 초반에 그녀를 보면서, 결말이 내다보인다고 생각했다. 냉미녀 리쿠가 눈물이 뭔지 알게 되겠지. 울고 싶지만 울지 못하는 기분, 정말로 눈물이 몸에서 흘러나온다는 기분을. 너무 뻔하지 않은가. <아이사와 리쿠>는 감정을 배워가는 십대 소녀의 이야기로군. 스포일러가 되자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 시큰둥하게 책장을 넘기던 내가 아이사와 리쿠처럼 변해간다는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남들 보기에 딱 좋던 리쿠의 일상이 변화하는 것은 아빠의 애인이 아빠를 졸라서 산 앵무새를 집에 가져오면서다. 리쿠는 앵무새를 죽이려다 실패한다. 엄마가 바라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엄마는 리쿠를 간사이 이모할머니 집으로 보내버린다. 그곳의 식구들은 다 끔찍할 정도로 시끄럽다. (그리고 그들과의 관계에서 리쿠가 변해간다.) 리쿠의 엄마는 그동안 자기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포기했던 자기 인생이라는 것을, 더 늦기 전에 탐색하고 싶었다. 남편이 바람피우는 것 정도는 모르지 않았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을 제외하면 나쁜 것이 없었으니까. 리쿠의 아빠는 딸이 떠나 있는 동안 아내가 전 같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울고 싶지 않아도 울 수 있는 재주.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우는 법을 배우거나 울지 않는 법을 배우고, 어떤 기분인지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가고, 어떤 마음이었는지 잊어가면서 매일을 잘도 흘려보낸다. 남들 눈에 괜찮은 이상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믿어버린다. 리쿠가 부모 곁에서 멀어져 있는 동안, 리쿠가 그동안 두르고 살아왔던 삶의 태도가 어디로부터 왔는지가 더 명확해지고, 리쿠는 뒤늦게 진짜 감정이라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나 자신의 삶으로부터 거리두기에 실패하는 순간 그 모든 것이 진짜 나의 것이 되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