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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들은 살아 있다?
장영엽 2015-11-24

<007 스펙터>에 대해 궁금했던 여섯 가지 것들

#1 <007 스펙터>는 <007 스카이폴>의 속편인가?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007 퀀텀 오브 솔라스>(2008)가 개봉했던 7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전편인 <007 카지노 로얄>(2006)이 멈춘 바로 그 지점으로부터 시작되는 <007 퀀텀 오브 솔라스>의 오프닝은 팬들에게 충격과 놀라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세계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지속적으로 출연하는 등장인물과 악당은 있을지언정 이전의 본드 영화들은 대개 별개의 작품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니얼 크레이그가 새롭게 열어젖힌 007 시리즈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개연성이다. 과거의 사건과 결과가 현재의 제임스 본드를 만드는 것이다. <007 카지노 로얄>의 속편이라 부를 수 있는 <007 퀀텀 오브 솔라스>는 21세기 본드 프랜차이즈가 획득한 이 새로운 개성의 명백한 증거였다. 샘 멘데스가 합류한 <007 스카이폴>(2012)의 경우는 좀 다르다. 시리즈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길 바랐던 샘 멘데스는 전편의 내용을 이어나가기보다 본드에게 닥친 새로운 위기를 조명하고 MI6의 주요 인물을 세대교체하는 데 힘을 실었다. 때문에 <007 스카이폴>은 전편과는 다소 동떨어진 작품이 되었다. 그로부터 3년 만에 선보인 <007 스펙터>는 대니얼 크레이그가 출연한 세편의 본드 영화를 정리하는 느낌이 강하다. <007 카지노 로얄>부터 <007 스카이폴>까지 본드가 상대했던 악당들이 사실은 스펙터라는 글로벌 악당 조직의 일원이며, 그들의 배후에는 오버하우저라는 미스터리한 인물이 있다는 것이 <007 스펙터>의 기본 줄거리다. 더불어 주디 덴치의 M이 죽음으로 퇴장한 자리를 대체하는 MI6 동료들- M과 머니페니, Q- 의 활약도 이번 영화가 보여주어야 할 숙제다. 샘 멘데스는 “<007 스펙터>를 <007 스카이폴2>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이 영화는 <007 스카이폴>의 속편이라기보다 대니얼 크레이그의 본드 3부작이 미처 맺음짓지 못한 서사의 빈틈을 새로운 상상력으로 채우고, 세 작품의 연결고리를 보다 단단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2 정체불명의 조직, 스펙터의 면모는?

정보기관, 테러리즘, 복수와 갈취를 위한 특수조직(Special Executive for Counter-intelligence, Terrorism, Revenge and Extortion). 이번 영화에서 본드가 맞서야 할 조직 스펙터(SPECTRE)는 긴 이름만큼이나 007의 세계에서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 <007 썬더볼 작전>(1959)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이 조직은 여섯편의 본드 영화, <007 살인번호>(1962)와 <007 위기일발>(1963), <007 썬더볼 작전>(1965)과 <007 두번 산다>(1967), <007 여왕 폐하 대작전>(1969)과 <007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71)에서 그 존재감을 드러낸 바있다. 하지만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게슈타포와 마피아, 소련 정보요원 등을 조직원으로 두고 있던 과거 조직의 정체성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기에 샘 멘데스와 <007 스펙터>의 제작진은 이 악당 조직을 현대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공을 들였다. 어쩌면 <007 퀀텀 오브 솔라스>에서 미스터 화이트가 탈출 직전 본드에게 건넸던 말이 가장 큰 힌트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 첨단 감시 장비와 기술로 무장한 스펙터의 주요 조직원들은 더 많이, 더 빨리 아는 자가 패권을 쟁취하는 21세기 정보전의 산물이다. 늘 본드보다 한발 앞서 정보를 얻는 이들은 여전히 뛰고 구르는 현장요원 제임스 본드가 한계에 직면하게 하는 존재다.

#3 스펙터의 수장, 오버하우저는 사상 최강의 악당인가?

스물네 번째 본드 영화의 이름이 <007 스펙터>로 확정됐을 때, 시리즈의 팬이라면 한번쯤 이런 질문을 던져봤을 거다. ‘그래서, 에른스트 블로펠드는 부활하는가?’ 대머리와 눈가의 흉터, 늘 팔에 안고 있는 흰 고양이로 기억되는 과거 본드 영화(<007 두번 산다> <007 여왕 폐하 대작전>등) 속 스펙터 조직의 수장 말이다. 하지만 샘 멘데스는 007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악당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블로펠드를 팬들이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소환하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007 스카이폴>이 스치듯 언급했던 본드의 과거와 깊은 관련이 있는 프란츠 오버하우저(이후에 블로펠드가 될 수도 있을 거라 짐작되지만 확정된 바는 없다)는 이언 플레밍의 단편소설 <옥토퍼시>(1966)와 샘 멘데스의 상상력이 결합된 캐릭터다. 흥미로운 점은 본드와 과거를 공유하고 있는 오버하우저가 샘 멘데스가 창조해낸 또 다른 악당 <007 스카이폴>의 실바와 묘한 대구를 이룬다는 것이다. 실바와 본드가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던 M의 인정을 갈구하는 존재들이었다면, <007 스펙터>에서 오버하우저와 본드는 부성애를 두고 한때 경쟁했던 사이다. 유사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이 어떻게 괴물이 되어갔는지 조명하는 건 <007 스카이폴>의 중요한 관심사였고 <007 스펙터> 역시 악당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방향성을 고수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007 시리즈의 주요 인물로 출연해 본드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M과 달리 이 영화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유대관계는 생략되어 있으며 단지 대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오버하우저가 본드에게 느끼는 분노의 깊이를 공감하게 하는 장치의 부재는 악당으로서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고, 강력한 악당의 부재는 <007 스펙터>의 가장 큰 단점으로 작용한다. 딱 떨어지는 제복을 입고 지극히 침착한 표정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을 연기한 크리스토프 왈츠의 모습도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 이상의 감흥을 주지는 못한다.

#4 제임스 본드는 새로운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수많은 여자들이 널 위해 죽었어.” <007 퀀텀 오브 솔라스>에서 M은 본드에게 이렇게 말한다. 첫사랑 베스퍼 린드를 잃은 뒤, 제임스 본드는 마음을 굳게 닫고 여자들과 순간의 쾌락과 즐거움을 공유하는 관계에 머물렀으며 그와 동침한 여자들은 어김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007 스펙터>는 대니얼 크레이그의 본드 시대가 열린 이후 죽음으로 퇴장하지 않는 본드의 첫 연인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레아 세이두가 연기하는 마들렌 스완 박사는 스펙터 조직의 행방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베스퍼 린드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본드를 경계하지만, 여정을 함께하며 점점 그에게 빠져든다. 한편 본드에게 살해당하는 스펙터 조직원의 미망인 루시아로 모니카 벨루치가 출연하는데, 그녀는 스펙터의 회의 장소인 로마에서 본드와 뜨거운 순간을 나눈다. <007 스펙터>의 의상 디자이너 재니 테밈은 “1950년대 무비 스타의 실제 삶”으로부터 마들렌과 루시아 룩의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마들렌은 그레이스 켈리가 롤모델이었고, 루시아의 경우 소피아 로렌과 지나 롤로브리지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말은 곧 ‘본드걸’로서 두 여성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마들렌은 우아함과 기품을, 루시아는 이국적이고 육감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 007 시리즈가 묘사하는 여성 캐릭터의 자장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5 액션 블록버스터로서의 볼거리는 충분한가?

방대한 해외 로케이션과 화려한 특수효과,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액션장면에 승부수를 거는 여타의 경쟁작과 마찬가지로, <007 스펙터> 역시 액션 블록버스터로서의 기능에 충실한 작품이다. 특히 멕시코시티의 ‘죽음의 날’ 페스티벌로 포문을 여는 오프닝 시퀀스의 스펙터클은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수만명이 모여든 소칼로 광장 상공의 헬리콥터 조종석에서 본드와 조종사가 엎치락뒤치락하며 격투를 벌이는 동안, 헬리콥터가 수직으로 낙하하며 휘청이는 장면이 긴장감 넘치게 촬영되었다. 멕시코시티에서의 인상적인 액션 시퀀스에서는 로저 디킨스(<007 스카이폴>)가 하차한 자리에 새롭게 합류한 촬영감독 호이트 반 호이테마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발코니를 걷던 본드가 다른 건물로 발걸음을 옮기고, 누군가를 저격하려다 도리어 예상치 못한 폭발에 무너지는 건물로부터 탈출하는 장면을 긴 호흡으로 담아낸 시퀀스도 호이테마의 촬영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이 밖에도 비행기가 썰매처럼 설원을 질주하는 오스트리아에서의 액션 시퀀스, 본드의 애스턴마틴 DB 10과 스펙터 조직의 악당 힝스의 재규어 C-X75가 로마의 밤거리를 무시무시한 속도로 질주하는 장면도 볼거리다.

#6 샘 멘데스는 새로운 비전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는가?

샘 멘데스에 따르면, <007 스펙터>에서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건 “시리즈의 고전적인 글래머를 되살리고 <007 스카이폴>에 남겨둔 새로운 캐릭터들의 다양한 면모를 탐구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과연 “죽은 자들은 살아 있다”는 ‘죽음의 날’ 축제의 메시지처럼, 샘 멘데스는 시대가 지남에 따라 매몰되었던 과거 본드 시리즈의 클래식한 유산을 현대적으로 복원해 생기를 불어넣고자 한다(더 자세한 내용은 61쪽 트리비아 참조). 하지만 전편을 통해 자신이 새롭게 만들어낸 캐릭터들의 정체성과 역할을 효과적으로 제시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외부의 위협과 조직 내부의 혼란을 함께 조명하는 건 이미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가 성공적으로 해냈던 것들이며, 이를 대처해나가는 과정에서 MI6의 새로운 멤버들은 그들의 미래를 기대하게 할 만큼 매력적인 팀플레이를 선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본드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자신의 과거로부터 파생된 악과 마주하고 새로운 사랑의 가능성을 포용하는 그의 모습은 대니얼 크레이그의 본드 1막을 마무리하는 정리의 느낌이 강하다. 죽은 자들은 살아돌아왔지만 산 자들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 샘 멘데스의 마지막 본드 영화인 <007 스펙터>는 이 질문에 대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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