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호 감독은 스스로에게 정직하고, 무엇보다 부지런한 감독이다. 유괴된 딸을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 <파괴된 사나이>로 2010년 데뷔한 그는 불과 2년 뒤 2012년 생계형 남파 간첩들의 이야기를 다룬 <간첩>을 선보였고 2015년 11월, 범죄 스릴러 <내부자들>로 돌아왔다. 다소 아쉬움을 남겼던 전작들에 대한 평가와 달리 <내부자들>은 평론가 및 기자들 사이에서 여태까지 그의 작품 중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내부자들>은 그가 “영화 만드는 태도를 완전히 달리한 작품”이자 “탄탄한 원작, 뛰어난 배우들과 스탭진으로 무장해 긴밀한 소통으로 탄생시켜냈다”라고 자부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는 윤태호 작가의 웹툰 원작 <내부자들>에서 정•재계, 언론간의 유착과 비리에 대한 설정을 가져오되 비리 세력에 당한 뒤 복수를 계획하는 조연이었던 ‘깡패’ 안상구를 주인공으로 부각시키며 영화의 ‘훅’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수저의 계급론’에 시달리는 현 세대가 십분 공감할 수 있는 “백도 없고 줄도 없는 우장훈 검사” 캐릭터도 추가됐다. 그렇게 시사만화에 가깝던 원작 <내부자들>은 드라마틱한 한편의 영화로 탄생했다. 영화 <내부자들>의 은밀한 내부와 함께 우민호 감독의 속내 또한 들여다본 대화를 지면에 옮긴다.
-<내부자들> 개봉을 앞둔 기분은 어떤가.
=설레고 떨리고, 잠도 안 온다. (웃음)
-웹툰 <내부자들>을 어떻게 영화화하게 된 건가.
=<파괴된 사나이> 투자배급사였던 데이지&시너지 엔터테인먼트 김원국 대표가 <내부자들> 원작 판권이 있다더라. 원작을 보고 그 에너지와 리얼리티에 압도당해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미 익히 알고 있고, TV만 틀면 뉴스에서 나오는 이야기다. 뉴스에서만 보던 그 이야기를 극장에서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로 즐겼으면 하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현실에선 거대 권력의 장벽을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겠지만, 극장 안에서만큼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 보는 관객에게 통쾌함과 위로와 희망을 선사하고 싶었다. 관객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극장 밖으로 나왔을 때 <내부자들>에 대한 흥미를 정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간다면 성공 아니겠나.
-올해 <베테랑> <치외법권> <성난 변호사> 등 기득권에 대한 비판과 통쾌한 한판승을 보여주는 유사 장르영화가 유독 많았다. 개봉이 많이 밀렸는데, 먼저 개봉했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을 것 같다.
=개봉이 밀린 데 대한 아쉬움은 없다. 순서편집본이 3시간40분이 나와 편집이 힘들었다. 내가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후반작업을 할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오히려 좋았다. 유사한 장르영화들과의 차별점이라면 <내부자들>은 어떤 영화보다 적나라하게 기득권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거다. 단지 한 단면이 아닌 정•재계와 언론의 유착, 비리 관계의 큰 판을 포괄적으로 깊이 있게 보여준다. 또한 이병헌, 조승우 등 이런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지 않던 배우들을 캐스팅해 의외성을 준 것도 다른 점이다.
-웹툰은 영화 속 분량으로 치면 3분의 1 분량도 연재가 안 된 상황이고, 현 정치판에 대한 묘사와 풍자극에 가까운 작품이다. 여기서 어떻게 서사와 캐릭터를 뽑아냈나.
=웹툰은 대한민국의 부정부패와 시스템을 묘사하는 시사교양 만화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윤태호 작가가 깔아준 판에 정보전달적 부분은 걷어내고, 리얼리티가 주는 에너지와 목표만을 가져오고자 했다. 등장인물 중 정•재계의 하수인 노릇을 하다 버림받은 ‘정치 깡패’ 안상구(이병헌)라는 조연을 주연으로 부각시키고, 우장훈(조승우) 검사라는 새로운 인물을 창작해 치열한 개인들의 대결에 집중했다. 그러니 누아르적 색채가 나오더라. ‘정치 깡패의 복수’라는 스토리라인이 후킹하지 않나. 이 지점에서 영화적인 부분을 잡은 거다.
-웹툰 <내부자들>의 완결을 영화 <내부자들>이 내준 셈이다. 고민이 많았겠다.
=웹툰은 연재가 중단된 상태지만,(최근 관객과의 대화에서 윤태호 작가는 “정치를 예리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내성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과연 창작자로서 잘하고 있는가?'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껴 연재를 중단하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편집자) 작품이 어딜 향해 가야 할지는 명확했다. 결국 <내부자들>은 ‘내부자들’의 실체를 까발리고자 하는 이야기다. 그 에너지와 방향성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방법적으론 영화 <스팅>(1973) 같은 반전을 보여주고 싶었다. 깡패의 복수 이야기니 칼과 주먹으로 복수할 것이라 예상하겠지만, 정반대의 지략을 보여주는 거다. 영화 속 이강희 논설주간(백윤식)이 “어차피 대중은 개, 돼지입니다.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라고 하지 않나. 영화를 통해 “우리는 끝까지 너희를 향해 짖어댈 거다”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후반부의 반전에선 치밀하게 많은 걸 짜맞추려다보니 다소 작위적이 된 인상도 든다.
=작위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현실보다는 장르로 접근해 영화적으로 해석하고 싶었다. 현실은 씁쓸할지언정 관객이 극장 안에선 통쾌한 낭만을 느꼈으면 했다.
-원작 웹툰 속 안상구는 거칠고 무식하며 덩치 큰, 클리셰에 가까운 조폭이다. 상반되는 이미지인 이병헌을 캐스팅한 이유가 있나.
=안상구라는 캐릭터를 주연으로 만들고 나서, 이런 캐릭터를 많이 해왔던 배우들이 이 역할을 맡으면 재미없고 뻔할 것 같더라. 의외성을 주고 싶었다. 캐스팅 제안은 했지만 이병헌이 <광해, 왕이 된 남자>(2012)가 끝나고 할리우드영화들에 도전하느라 정신없이 바쁠 시기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전달한 뒤 사흘 만에 연락이 왔다. 해보지 않은 역할이라 구미가 확 당겼다고 하더라. 전혀 예상치 못한 구애에 성공한 기분이랄까. 멍했다. (웃음)
-이병헌이 안상구 캐릭터에 허술하면서도 능청맞은 톤을 입히자고 먼저 제안했다던데.
=원래 캐릭터는 드라이하고 강한 캐릭터였다. 그런데 이병헌이 이야기 자체도 워낙 밀도 있고 팍팍하니 안상구 캐릭터로 쉬어갈 지점들을 만들어주자는 제안을 했다. 상업적으로 영화를 볼 줄 아는 똑똑한 배우구나 싶었다. 바로 받아들여 시나리오에 반영했다. 곳곳에 쉬어갈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줘 결과적으로 더 좋은 작품이 나왔다.
-우장훈 검사 역은 원작에는 없고 새로 창작한 캐릭터다.
=능력 있지만 백 없고 족보 없는 우 검사는 대중이 공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만들어낸 캐릭터다. 현 시대는 자신의 일만 잘한다고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잘하든지 아니면 잘 좀 태어나든지”, 이런 대사는 참 아프면서도 공감이 가지 않나. 우 검사는 자기 손으로 나쁜 놈들을 잡아 성공하겠다는 욕망을 불태운다. 그를 통해 현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부여하고 싶었다. 복수를 해야 하는 정치 깡패와 성공을 위해 비리 세력을 잡아야 하는 검사의 이야기를 맞물리게 하고 싶었다.
-이 역할에 조승우를 캐스팅한 것도 예상 가능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승우는 무조건 1순위였다. 상처 입은 날짐승 같은 느낌이 매력적이지 않나. 처음엔 자신이 검사를 맡기엔 어려 보인다며 고사하더라. 그런데 조승우가 이병헌의 굉장한 팬이다. 삼고초려 끝에, 이병헌과 함께 연기할 수 있는 기회라며 조승우를 설득해 캐스팅할 수 있었다. (웃음) 결과적으로 그의 강하면서도 연약해 보이는 모순적인 이미지가 정의와 성공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역할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 것 같다.
-이병헌은 당신이 캐릭터에 대한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고 며칠 만에 금세 반영해내 좋았다더라. <내부자들>의 이민수 PD는 “PD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감독이 메인 스탭들과 배우들과의 소통이 원활해야 하는 것인데, 그런 면에서 우민호 감독은 뛰어났다”고도 하던데.
=영화를 만드는 내 태도가 바뀐 것 같다. 사실 영화를 찍다보면 감독이 헷갈릴 때도 있다. 예전엔 그걸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숨겼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선 배우와 스탭들을 믿었다. 모르겠으면 모르겠다고 터놓고 같이 고민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 결과 배우들과 스탭에게 많이 배웠다. 현장이 친밀한 분위기였고, 나도 배우도 스탭들도 서로 숨김없이 솔직하게 소통하며 함께 영화를 만들어갔다. 그들의 공이 크다.
-특히 공을 돌리고 싶은 스탭이 있나.
=고락선 촬영감독이 든든한 오른팔이 되어줬다. 조명감독 출신인데, 빛을 다루는 능력과 작품을 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그와의 상의 끝에 관객이 배경보다는 인물에 집중할 수 있게끔 2.85:1 대신 1.85:1 비율을 사용했다. <내부자들>의 일부 장면은 TV 속 뉴스 화면처럼 보였으면 했다. 이를테면 성접대 장면은 선정적인 장면이 아니라 마치 뉴스에 보도되는 한 장면처럼 보이도록 노력했다. 또, 컷을 많이 쓰지 않으려 했다. 한컷을 찍더라도 집중력 있게 제대로 찍자는 생각이었다. 영화가 필름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바람에 감독들의 컷에 대한 욕심이 많아졌지 않나. 우리는 컷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나서 고전적으로 작업을 해보기로 했다. 컷을 보면 카메라도 많이 움직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론 이강희와 우 검사가 취조서에서 대면하는 시퀀스를 좋아한다. 두 사람의 연기와 미디엄숏은 정적이면서도 영화적이다. 앞으로도 이런 고전적인 스타일로 찍을 생각이다.
-고전영화에 애착이 있어 보인다.
=어릴 적부터 이른바 <토요명화> 애청자였다. EBS <세계의 명화>도 꼬박꼬박 챙겨봤다. <장고> <황야의 무법자> <돌아온 튜니티> 등 서부극을 특히 좋아했다. 성장해선 마틴 스코시즈 영화들도 좋아하게 됐고. 기본적으로 선이 굵고 남성적인 액션영화를 좋아한다. 하도 영화 보는 걸 좋아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진학했고,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교에서도 영화 연출을 전공했다.
-<파괴된 사나이>로 2010년 입봉하기까지 10년간 감독 데뷔를 준비했다고 들었다.
=유학을 다녀와서 2000년에 쓴 단편 <무기여 안녕>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제작지원 프로그램인 ‘뉴 디렉터스 인 포커스’(NDIF) 부문 대상을 수상한 뒤, 영화사를 연결받았다. 하지만 입봉이 쉽진 않더라. 이후 10년간 시나리오를 계속 쓰고 엎어지는 과정을 거쳤다. 입봉작 <파괴된 사나이>는 나 자신을 투영한 작품이다. 영화에서 목사였던 주인공이 딸을 잃은 후 믿음을 버리고 살다가 딸이 살아 있다는 희망을 갖기 시작하면서 믿음을 회복하게 되지 않나. 10년 동안 그런 시간을 겪다 보니 영화를 계속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영화를 보는 즐거움마저 박탈당한 느낌이 들었다. 첫 작품 <파괴된 사나이>는 영화에 대한 나의 믿음과 사랑을 복원한 계기였다.
-데뷔한 후부터는 <간첩> <내부자들>에 이르기까지 2~3년 간격으로 꾸준히 신작을 내놓고 있다.
=항상 전작들에 대해 아쉽고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있기에 다음번에는 만족할 만한 작품을 만들자는 마음이 생기곤 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만들자’는 다짐을 하게 된다. 어쩌면 자격지심일 수도 있는 그 마음을, 감독으로서 더 나아지고 싶다는 원동력으로 늘 시나리오를 쓴다. 사실 <파괴된 사나이> 이후 누가 나에게 좋은 시나리오를 주겠나. (웃음) 그러니 내가 직접 쓰는 거다. 감독이 영화 제목을 따라간다고, <파괴된 사나이> 이후 <간첩>처럼 칩거하며 시나리오를 썼다. 그래도 영화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만들어지는 거라고, 다행스럽게 <내부자들>까지 왔다. 다음 영화는 더 좋은 작품을 만들 거다.
-차기작은 어떤 작품인가. 어떤 색깔의 영화를 보여줄 건지 궁금하다.
=쇼박스와 계약이 되어 있지만, 구체화된 계획은 없다. <내부자들>은 사회 현실을 바탕으로 한 영화였지만, 이번에는 더 영화적이고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 팝콘 먹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를 하고 싶다. <내부자들>은 우리끼리 ‘구강 액션’ 영화라고 불렀는데(웃음) 이번에는 몸과 몸이 부딪히는 액션영화를 하고 싶다. 여배우에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 속 여배우 레베카 퍼거슨의 강렬한 액션이 인상적이었다. 남성의 액션보다 통쾌하고 짜릿하더라. 여성이 강하게 나오는 액션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나의 색이라면 글쎄, 아직까지는 찾아나가고 헤매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한 작품 한 작품 잘해나가다보면 누군가가 ‘우민호의 색은 이런 색이다’라고 말해줄 때가 오겠지.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