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 감독의 <로얄 테넌바움>은 문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난 어느 집안 이야기다. 집안 얘기라지만 진부한 가족주의에 대한 설교와는 친연관계가 없다. 영화는 가족이라는 모진 인연에 대해 진지한 어법 대신 시종 가볍고 익살스런 말투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로얄 테넌바움(진 해크먼)은 파산한 변호사다. 22년 전 아내와 별거한 이래 계속 거주해오던 호텔에서도 쫓겨났다. 테넌바움 집안엔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발에 채인다. 지성과 극성을 함께 갖춘 고고학자인 아내 애슬린(안젤리카 휴스턴)은 남다른 교육열로 남매 셋을 모두 천재로 키워냈다. 입양한 맏딸 마고(귀네스 펠트로)는 문학적 소양이 뛰어나 열다섯 살 때 이미 희곡으로 퓰리처상을 거머쥐었다. 둘째 채스(벤 스틸러)는 여섯 살 때 달마시안 무늬가 있는 생쥐를 교배해낸 괴짜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동산과 금융 분야에서 천재성을 발휘했다. 셋째인 리치(루크 윌슨)는 10대 때 주니어 테니스 세계 랭킹에 오른 테니스의 귀재다. 여기까지가 테넌바움 가문의 빛나던 시절이다. 로얄과 애슬린 부부가 별거에 들어간 뒤부터 세 천재는 박제가 되는 길을 걷는다. 문학과 세상 모두에 환멸을 느낀 마고는 하루 종일 목욕탕 안에서 담배와 텔레비전만 끼고 산다. 비행기 사고로 아내를 잃은 채스는 두 아이와 함께 언제나 빨강 아디다스 운동복을 입고 다니며 일주일에 열여섯 번씩이나 재난 대비 자체 비상훈련을 실시한다. 테니스 천재 리치는 마음 속으로 좋아했던 입양된 누나 마고가 결혼을 발표하자 경기 도중 망연자실해 완패한 뒤 망망대해를 떠돌며 여행으로 지새운다. 세 남매는 모두 세상에서 입은 상처가 아물지 않아 스스로를 과거에 가두고 성장을 멈춰버렸다. 테넌바움 집안의 회계사 헨리 셔먼(대니 글로버)이 애슬린에게 청혼했다는 얘기에 발끈한 로얄은 “위암 때문에 6주간의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는 거짓말로 테넌바움 집안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다. 이로 인해 흩어졌던 식구들이 다시 모인다. 그의 거짓말은 6주 만에 들통 나지만, 이 짧은 재회는 세 남매가 뒤집어쓰고 있던 각질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프롤로그, 에필로그를 포함해 모두 10개의 장으로 구성된 영화는 각 장마다 등장인물 한 사람씩을 주인으로 삼아 그의 개성을 그려내면서 여기에 현재진행형의 사건을 얹어 이야기를 풀어간다. 모든 등장인물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고루 돌리고 있다는 게 이 수다스런 영화의 남다른 미덕이다.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역시 로얄이다. 그는 아내 자식 재산 명예 등 모든 걸 다 잃어버린 철저한 패배자다. 그는 비록 자상하고 사려 깊은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폐쇄적으로 길러지는 손자들을 데리고 나가 쓰레기차 뒤에 몰래 올라타기, 대로 무단 횡단하기, 슈퍼마켓 물건 훔치기, 투견장에서 고함지르기 따위를 통해 일종의 ‘호연지기’를 길러줄 줄 아는 사람이다. 영화에서 각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가장 깊은 상처를 안길 수 있다는 건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가장 차가운 역설일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인생에서 철저히 패배한 이가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매우 많은 걸 베풀어줄 수도 있다는 따뜻한 역설도 함께 보여준다. 이상수 기자leess@hani.co.kr